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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910 - 가해 연중 제23주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0 조회수1,61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9 10 () 가해 연중 제23주일 복음 묵상

Twenty-third Sunday in Ordinary Time

에제키엘서 33,7-9
로마서 13,8-10
마태오복음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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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 에제키엘서 33,7-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Reading 1


Ez 33:7-9

Thus says the LORD:
You, son of man, I have appointed watchman for the house of Israel; when you hear me say anything, you shall warn them for me.
If I tell the wicked, "O wicked one, you shall surely die”, and you do not speak out to dissuade the wicked from his way, the wicked shall die for his guilt, but I will hold you responsible for his death.
But if you warn the wicked, trying to turn him from his way, and he refuses to turn from his way, he shall die for his guilt, but you shall save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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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Reading 2


Rom 13:8-10

Brothers and sisters:
Owe nothing to anyone, except to love one another; for the one who loves another has fulfilled the law.
The commandments,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you shall not kill; you shall not steal; you shall not covet," and whatever other commandment there may be,
are summed up in this saying, namely,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Love does no evil to the neighbor; henc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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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Gospel


Mt 18:15-20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your brother sins against you, go and tell him his fault between you and him alone. If he listens to you, you have won over your brother. If he does not listen, take one or two others along with you, so that 'every fact may be established on the testimony of two or three witnesses.' If he refuses to listen to them, tell the church. If he refuses to listen even to the church, then treat him as you would a Gentile or a tax collector.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bind on earth sha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shall be loosed in heaven. Again, amen, I say to you, if two of you agree on earth about anything for which they are to pray, it shall be granted to them by my heavenly Father.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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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09 10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내 것을 다 주고도 못 준 것이 없는지 둘러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내가 지닌 소유와 집착, 이기심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하는 의무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면,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의 정신을 완성한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칩니다.
사랑은 자비와 선의로 채워지지만, 그렇다고 악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거짓 앞에서 사랑은 침묵하고 인내하기에 앞서 올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한 정의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웃과의 사랑을 관계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가르치십니다. 죄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에 그를 꾸짖는 행위도 사랑에 속합니다. 혹시라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상대의 진의를 왜곡할 수 있기에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은 다른 두세 사람의 증인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기기만과 편견에 빠진 사람까지 끌어안으라고 예수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행위가 자칫 불의를 용인하고, 거짓을 인내하는 위선적인 사랑으로 변질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는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고 강조합니다. 무뎌진 마음으로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악에 맞서 선의 승리를 선포하고, 거짓과 위선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사회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의 악의 연대가 강해 보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신앙 공동체의 영의 연대가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우리의 예언자 직무를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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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904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지혜서 9,13-18
필레몬서 9-10.12-17
루카복음 14,25-33


바오로 사도의 늙은 모습과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더욱 실감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는 인간의 면모가 생각납니다. 위대한 사도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 애쓰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은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포기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몹시도 힘든 길이며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욕망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 여정 안에서 우리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갈 십자가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주님과 분리될 동기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작은 희생과 고통들을 구원의 열매로 바꾸어 주십니다.
일상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변모됩니다. 우리가 가지는 작은 용기를 통해 교회는 건설됩니다. 우리가 지니는 전적인 신뢰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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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06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이사야서 35,4-7
야고보서 2,1-5
마르코복음 7,31-37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습니다. 유아 세례 예식 중에 신앙의 귀, 마음의 귀를 열어 주는 ‘열려라(에파타)’ 예식이 있는데, 이때 사제는 엄지손가락으로 세례 받는 아기의 귀와 입을 만지며 “주 예수님,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셨으니, 이 아기도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귀머거리나 말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을 동시에 만났을 때, 매끈하게 차려입은 사람 쪽으로 눈길이 쏠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야고보서는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참신앙인은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않는다고 충고합니다. 사람 차별, 이것이야말로 일부러 들으려고 하지 않고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인 우리가, 교회가 하늘 나라의 씨앗이요 누룩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훌륭한’ 일들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귀먹은 이를 듣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기는 어렵겠지만, 금가락지 낀 이들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더 갖고 먼저 마음을 기울인다면, 우리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도와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 실현을 앞당기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과 귀를 활짝 열어 주시어 우리의 삶이 주님을 찬미하며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귀에 살짝 대고 간청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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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07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에제키엘서 33,7-9
로마서 13,8-10
마태오복음 18,15-20


오늘의 독서를 묵상하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이 세상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엄중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거듭 깨닫습니다. 이웃 사랑은 감상적인 느낌이나 기분 내킬 때 베푸는 시혜가 아닙니다. 서로서로 지고 있는 외면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똑바로 인식하고 실행하는, 수고와 용기를 요구하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지고 가야 하는 사랑의 빚은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 나오듯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예언자가 파수꾼의 두 가지 역할을 지니는 것과도 같습니다. 파수꾼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또한 파수꾼은 불의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형제들을 자신의 안위를 돌보는 것에 앞서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차원의 깨달음과 실천을 품고 있습니다. 불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가 있을 때 이웃 사랑은 그저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뼈와 살을 가진 실재가 됩니다. 그러기에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공범’이 된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기억하고, 각성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월호’의 참극은 이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분노의 바다가 우리에게 다가온 사월의 그날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의 기억을 고통스럽게 안고 살았던 이탈리아의 유다계 지식인 프리모 레비의 책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마음을 저미는 그의 시 ‘고통의 나날들: 까마귀의 노래 2’의 처음과 끝을 음미해 봅니다.
“그대가 버텨 온 날들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하나씩 세어 보았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왔던 고난의 세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어둠의 나날들/ 서서히 밝아 오는 새벽에 대한 공포감/ 그대를 기다리는 내 기다림의 불안감들/ (중략) 비록 그대의 꿈들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가을 낙엽이 구르고 시계가 멈추더라도/ 그대의 몸이 쇠락하고 삶의 마감이 오더라도/ 그대의 세상마저 저물어 새벽이 오지 않더라도/ 난 옆에서 그대를 지켜보고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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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08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지혜서 9,13-18
필레몬서 9-10.12-17
루카복음 14,25-33


새장에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새는 오랜 기간 그 안에서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본성이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나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새장의 문을 열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새를 놓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새장 문이 열리자 새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직까지 날갯짓을 해 보지 않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자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주는 모이나 먹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장은 이미 열렸으나 그 새는 좀처럼 나가려 하지를 않습니다. 지금처럼 새장 안에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쩌면 이러한 새장 속의 새인지도 모릅니다. 열등감, 죄의식, 상처, 분노, 죽음에 대한 공포 등 각자 자신만의 새장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새장의 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도 혹시 새장 속의 새처럼 문이 열려 있음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날갯짓을 포기하고, 새장에 갇힌 채 재산, 명예, 쾌락, 분주함 등의 ‘모이’나 먹으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새장에서 벗어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이’를 과감히 포기하고 날갯짓을 연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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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09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사야서 35,4-7
야고보서 2,1-5
마르코복음 7,31-37


예수님께서 반벙어리 이방인을 고쳐 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제대로 말을 하게 됩니다.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반벙어리 이방인이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 평소 살아가면서 닥친 어떤 불행으로 말미암아 언어 장애를 얻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듣기와 말하기의 장애 이상으로 총체적인 삶의 위기를 맞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이 안 나온다.” 또는 “기가 막힌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나의 어려움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슴이 답답한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반벙어리도 그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위기를 맞은 그의 처지를 헤아리셨습니다. 그리고 따스한 마음과 관심으로 다가가시어 그를 고쳐 주십니다.
‘장애인’ 하면 흔히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장애인도 있습니다. 마음에 미움, 편견, 이기심, 탐욕이 가득 차 있으면 그 사람 또한 영적인 장애인입니다. 마음이 무디어 다른 사람의 아픈 처지를 외면하는 것도 영적인 장애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열린 귀로 무엇을 듣고 있으며, 풀린 혀로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픈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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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904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에제키엘서 33,7-9
로마서 13,8-10
마태오복음 18,15-20


만 리 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 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일부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깊이 이해해 주고 믿어 주는 그런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런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모든 것을 믿어 주고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줄 수 있는 친구, 내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슬플 때 달려가 엉엉 울어도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며 내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 삶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생에서 그런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 기다리는 친구가 되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삶의 짐을 덜어 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손을 붙잡고 주님께 기도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의 비밀스러운 아픔을 품어 주고 함께 아파하며 사랑해 주는 사람,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그를 외면해도 나만은 곁에 남아 그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기다리는 그런 좋은 친구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줄 때 이미 내 곁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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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9 05)

지혜서 9,13-18
필레몬서 9-10.12-17
루카복음 14,25-33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약간의 고통이라도 우선 피하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통은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지만, 남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통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만큼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우리입니다.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십자가는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자신을 위한 길이라면 누구라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죽고 남을 살리는 행위가 곧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은 몹시도 힘든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서 걸어간다면,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바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을 걸으시면서 온갖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 이미 당신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이 십자가의 길을 평화의 길, 생명의 길, 참행복의 길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에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그 길은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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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06)

이사야서 35,4-7
야고보서 2,1-5
마르코복음 7,31-37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못 듣고 제대로 말 못하니 얼마나 야속한 운명인지요?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애절한 마음을 한눈에 읽으셨던 것입니다.
치유하시는 모습도 남다릅니다. 손가락을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혀에 대십니다. 그를 낫게 하시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얼마든지 낫게 할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 감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배려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하십니다. “열려라!”라는 뜻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파타!”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셨던 ‘아람어’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놀랐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발음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가 누구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그를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우리는 건강한 귀를 지녔습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에 얼마만큼 민감한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는데,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 봐야 합니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면 이제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기적의 연속’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때 마음을 여는 행동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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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07)

에제키엘서 33,7-9
로마서 13,8-10
마태오복음 18,15-20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한두 번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순간의 결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두고 쌓는 덕()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덕’입니다. 덕에 도달하려면 누구나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용서를 감정 차원으로 해석한 착각입니다.
순간에 생긴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온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미움이 쌓인 시간만큼 수련과 극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작은 용서’입니다.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작은 용서를 수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작은 용서가 몸에 배어야 큰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잘못하면 만나서 타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 형제는 가족입니다. 그들을 먼저 받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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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09)

지혜서 9,13-18
필레몬서 9-10.12-17
루카복음 14,25-33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국가 반역자를 처형하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였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도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삶의 역경을 평화의 계기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짊어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고통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저마다 다양하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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