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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910 - 가해 연중 제23주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0 조회수1,643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7
09 10 () 가해 연중 제23주일 복음 묵상


에제키엘서 33,7-9
로마서 13,8-10
마태오복음 18,15-20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70910)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일러보고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이것은 구약성서 「레위서」에 있는 행동지침을 「마태오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가 옮겨와 기록한 것입니다「레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19,17-18)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말고타이르는 노력을 하라는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대부분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율법서」의 표현을 빌려예수님이 가르친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며 기록하였습니다그들은 그런 노력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의 공동체 안에 살아있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 시대에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던 바를 요약한 것입니다이 말씀을 자구(字句그대로 오늘 우리를 위한 실천 지침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000년 전의 행동지침이 오늘도 그대로 통용될 수 없습니다시대가 다르면사람들의 행동 방식도 달라집니다.

옛날 사람들은 타일러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그것은 미덕(美德)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고좋은 말이 귀에 거슬린다.’는 격언이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옛날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앉아 잘 타일렀습니다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그러나 오늘은 그런 현상이 사라졌습니다현대인은 타이르는 행위를 불필요한 간섭으로 여기고충고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각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충고는 상대방의 자율성(自律性)을 침해하는 주제넘은 일로 이해됩니다오늘은 각자가 다양한 정보를 얻고각자가 취사선택하여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삽니다따라서 오늘 이웃에게 충고하면이웃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마음입니다오늘 복음은 비록 과거에 자기에게 피해를 준 이웃일지라도외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형제자매로 대하는 노력을 하라고 말합니다이웃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면먼저 둘이 만나서 타이르고그것으로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그래도 되지 않으면교회공동체에 알리면서까지 최선을 다 하라는 말입니다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모두 실패하면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생각하라는 말도 있었습니다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그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이교도나 세리에게 하듯이그를 건드리지 않고가만히 두라는 말입니다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이교도나 세리는 미워하고 없애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려 해도그 마음이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이웃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내가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그것이 이웃에게 반드시 전달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나는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어도상대방은 받은 상처 때문에 많이 아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그의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이웃 사랑은 먼저 이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그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는 말씀도 오늘 복음에 있었습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합니다예수님의 실천이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날 때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예수님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서로 사랑하시오.(15,17)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렸습니다그래서 그분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라는 인신공격성 혹평을 듣기까지 하셨습니다그 시대 유대교의 해석에 따르면세리와 죄인은 하느님이 버린 사람들입니다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도 세리와 죄인은 버려야 합니다그 시대 유대교는 사람들이 병을 앓는 것은 하느님이 벌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그런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님이 사람의 병을 고쳐준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짓는 행위로 보였습니다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죄인이라 외면하던 사람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도벌주지도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리려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그들이 모인 것은 재물이나 명예를 얻거나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실천하여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교회는 먼저 섬기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이 섬기면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고도 말씀하셨습니다신앙인들의 공동체에는 자발적 섬김이 돋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가난한 이병든 이버려진 이곧 그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섬김을 실천하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라야 합니다.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이들의 모임입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신앙인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웃 앞에 우월감을 가지지 않습니다신앙을 동기로 모였다고 하면서모여서 기도한다고 하면서사람을 비방하고 성토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그것은 배 아픈 사람의 모습입니다신앙공동체에는 섬김이 돋보여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1요한 4,7)고 요한사도는 말씀합니다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말입니다예수님도 군림하지 않고십자가에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7091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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