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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913 -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3 조회수2,01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9 13 () 가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Memorial of Saint John Chrysostom, Bishop and Doctor of the Church
Wednesday of the Twenty-third Week in Ordinary Time

콜로새서 3,1-11 / 코린토 17,25-31

루카복음 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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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3,1-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6 이것들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이러한 것들에 빠져 지낼 때에는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8
그러나 이제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Reading 1


Col 3:1-11

Brothers and sisters:
If you were raised with Christ, seek what is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Think of what is above, not of what is on earth.
For you have died, and your life is hidden with Christ in God.
When Christ your life appears, then you too will appear with him in glory.

Put to death, then, the parts of you that are earthly: immorality, impurity, passion, evil desire, and the greed that is idolatry.
Because of these the wrath of God is coming upon the disobedient.
By these you too once conducted yourselves, when you lived in that way.
But now you must put them all away: anger, fury, malice, slander, and obscene language out of your mouths. 
Stop lying to one another, since you have taken off the old self with its practices and have put on the new self, which is being renewed, for knowledge, in the image of its creator.
Here there is not Greek and Jew, circumcision and uncircumcision, barbarian, Scythian, slave, free; but Christ is all and in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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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7,25-31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Reading 1


1 COR 7:25-31

Brothers and sisters:
In regard to virgins, I have no commandment from the Lord, but I give my opinion as one who by the Lord
s mercy is trustworthy.
So this is what I think best because of the present distress: that it is a good thing for a person to remain as he is.
Are you bound to a wife? Do not seek a separation.
Are you free of a wife? Then do not look for a wife.
If you marry, however, you do not sin, nor does an unmarried woman sin if she marries; but such people will experience affliction in their earthly life, and I would like to spare you that.

I tell you, brothers, the time is running out.
From now on, let those having wives act as not having them, those weeping as not weeping, those rejoicing as not rejoicing, those buying as not owning, those using the world as not using it fully.
For the world in its present form is passing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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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Gospel


Lk 6:20-26

Raising his eyes toward his disciples Jesus said: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Blessed are you who are now hungry, for you will be satisfied. Blessed are you who are now weeping, for you will laugh. Blessed are you when people hate you, and when they exclude and insult you, and denounce your name as evil on account of the Son of Man. Rejoice and leap for joy on that day! Behold, your reward will be great in heaven. For their ancestors treated the prophets in the same way. But woe to you who are rich, for you have received your consolation. But woe to you who are filled now, for you will be hungry. Woe to you who laugh now, for you will grieve and weep. Woe to you when all speak well of you, for their ancestors treated the false prophets in this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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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9 13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행복이 있어서가 아니라,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복하다’는 잠시의 느낌과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된 행복’에 대해 가르치실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세상이 주는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미움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신 것은, 사라질 세상의 행복에 연연하지 말고, ‘저 위에 있는 것’, 곧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다가 겪게 되는 가난과 슬픔, 굶주림에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은 시간 속에서 영원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시는 말씀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제한된 세상의 재화를 독식하면서 이웃의 아픔과 무관하게 온 것이라면, 그런 행복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의 ‘과잉’에서 오는 고통이 크다고 합니다. 넘치도록 많은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혼란스럽고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덜어 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 그래서 영원하지 않을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옛 인간의 행실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탐욕과 분노, 격의, 악의, 중상, 거짓말을 내 인생에서 덜어 버리는 것이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평화와 기쁨을 맛보는 새 인간의 행복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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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9 07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인생은 행복이라는 광맥을 찾아 헤매는 여정입니다. 어떤 이들은 재물이나 권력, 명예에서 행복을 찾고,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정이나 깨달음에서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가난과 굶주림, 슬픔과 박해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유함과 풍족함, 웃음과 칭찬은 잠시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참된 행복이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바오로 사도는 환난과 역경, 굶주림과 헐벗음, 죽음의 칼날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의 동료인 레오 형제에게 “참되고 완전한 기쁨은 온갖 고통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영적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하느님 없이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이 없다.”고 실토합니다
성인들은 오늘 복음의 ‘산상 수훈’을 완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슬픔과 고통이 빼앗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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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09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기념일)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새로운 생명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라고 촉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지상에 머물고 있는 우리가, 천상의 것들만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또한 가난한 사람들도 도와주고 착한 일도 조금 하면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여 웃으며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그저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에서 가장 길게 서술되어 있는 마지막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웃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복음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박해한다면, 더욱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을 모욕하고 중상하는 그런 세상이라면, 그러한 세상의 논리와 셈법에 따라 동조하면서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 채, 눈앞의 편안함만을 찾고 거기에 만족하면서 안주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겠지요. 콜로새서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이들은저 위에 있는 것을무시하고현세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관심과 사고와 운신의 폭이 오로지 나와 내 집안뿐이고, 그나마 현세적 행복에만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 뵈어야 할 순간이 다가올수록 예수님의 불행 선언에 담긴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저 위에 있는 것을바라보면서 더 높은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이 손가락질하면서 거부하거나 박해를 하더라도, 그래서 울고 불행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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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 10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언하신참행복불행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한 이들이라고 여기시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느님의 나라에 더욱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라 새롭게 살아가려면 이처럼 세상 것에 고착되지 않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사회적 관계에 따른 역할을 다하는 하루하루가 때로는 힘겹기도 한 우리에게 이러한 참행복은 너무나 멀고 큰 이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일상에서 참행복을 체험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거창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각과 관점의 작은 방향 전환을 통해 일상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방식과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성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 달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장면 하나가 떠오릅니다. 한 할머니가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손녀를 위해 가정을 방문하는 사제 일행을 기다리십니다. 혹시라도 집을 잘 찾지 못할까 염려되어 일찌감치 밖에 나와 기다리신 것입니다. 손녀에게 신앙을, 예수님을 전해 줄 사람을 맞이하는 얼굴은 기쁨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료에게 과연 무엇을 간절하게 전해 주고 싶은지 가만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미 소박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한 시민의 삶을 시작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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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 11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느 날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료 레오 형제와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을 향해 걸어가면서 참된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인은 동료 형제들이 모범적인 성덕을 보여 준다 해도, 기적을 일으킨다고 해도, 온갖 지식을 섭렵했다 해도, 사람들을 회심으로 이끈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레오 형제는 몹시 놀라면서그렇다면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인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에 젖고, 추위에 얼고, 진창에 빠져 형편없이 되고, 배고파 기진맥진하여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에 겨우 도착해 수도원 문을 두드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문지기가 화를 내며 (중략) 바깥 쏟아지는 빗속에 우리를 밤중까지 내버려 둘 때, 그러한 욕설, 인정 없는 무자비한 대우, 매정한 거절도 우리가 인내로써 달게 받고 (중략) 복되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생각하고 즐거워한다면,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 (중략) 레오 형제! , 이제 결론을 들어 보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친구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온갖 은총과 선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바로 자기를 눌러 이기고, 고통, 모욕, 수치, 불쾌한 감정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달게 참아 받는 그것입니다’(『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참조).
프란치스코 성인은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란 온갖 고통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불행할 만한 상황을 가장 기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행복도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는지요? 우리는 과연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참되고 완전한 기쁨, 그 참행복을 갈망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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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 12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동정 마리아 성명 선택 기념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모든 인간은 저마다 행복을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행복에 대한 갈망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다양한 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라는 그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고백록』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성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제 안에 당신이 계시거늘 저는 제 밖에서 서성이며 당신을 찾았나이다.” 이는 하느님께 철저히 사로잡혀 있는 한 인간이 행복과 기쁨에 넘쳐 부른 고백입니다. 성인은 인간에게 하느님 없는 궁극적인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얻는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란 삶의 빈자리를 하느님께서 반드시 채워 주시리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신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리라고 믿으며 살기에 이기심이나 탐욕에 빠지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서 누구를 통해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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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907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지털카메라를 쓰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가 더 많았고, 그 사진은 현상소에 필름을 맡겨 인화를 해야만 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필름의 기록들이 인화지에 배어 나오는 순간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특히 흑백 필름을 인화해 본 사람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필름에서 어두운 부분이 인화지에는 희게 나오고 밝은 부분이 검게 나오면서 사진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면, 필름과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필름과 인화지의 관계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과 불행이 하늘 나라에서는 정반대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부유하게 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며 우는 사람이 웃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가난하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고 지금 웃고 있다고 좋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도 불행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기쁨과 슬픔은 삶에서 물결의 작은 움직임과 같습니다.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부유한 사람을 배척하시려는 것도,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을 정당화하시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행복은 결국 하느님 안에 있으니, 가난해도 희망을 잃지 말고 부유해도 겸손함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께 삶의 중심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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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9 08)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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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09)
(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기념일)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은 뜻밖입니다. 출발부터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의 우선 조건을 ‘부자’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난감한 표현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자라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은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어찌 행복하다 하시는지요? 풍요와 웃음이 행복의 ‘절대 조건’ 아닌지요? 세상의 판단과 너무 다른 말씀입니다. 하지만 ‘서럽고 병약한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본시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셔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주시지 않으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물질과 웃음이 넘쳐도 ‘주시지 않으면’ 온전한 행복은 아닙니다. ‘주님의 힘’이 함께해야만 삶의 불안이 사라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믿음을 가집니다. 삶의 어려움이 깊어지면 기댈 곳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함께하시기에’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가끔은 돌아봐야 합니다. 결국은 두고 갈 것들입니다. 너무 바동거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은 질문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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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10)


‘참행복’에 관한 말씀은 루카 복음과 마태오 복음에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러나 ‘불행 선언’은 루카 복음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행 선언’을 말씀하셨음에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사실을 몰랐거나, 편집 과정에서 빠뜨렸을지도 모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겨냥한 독자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유다인을 상대로 복음을 기록했던 겁니다. 그들은 이방인에 비해 부유했습니다. 생활이 안정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가난한 이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을 편집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루카 복음에는 소외된 이들과 약자들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습니다. 루카 역시도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불행 선언’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참행복’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나누지 않는 삶’과 ‘자만에 사로잡힌 삶’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것이 많다고 쉽게 나누지는 않습니다. 많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것입니다. 나중에는 명예까지도 욕심냅니다.
소유가 많고 적음은 ‘인간 사회의 구분’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분께는 ‘있는 이나 없는 이나’ 똑같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죽을 때에는 두고 가야 합니다. 평범한 이 사실을 외면하면 정말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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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12)
(
동정 마리아 성명 선택 기념일)


오늘 복음은 행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에 대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부족함을 느끼는 데 행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넉넉하고 넘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을 행복의 첫 조건으로 꼽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마음을 비우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채우라는 것일까요?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는 모두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듯이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의 가난은 욕망 앞에서 절제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지식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얼렁뚱땅 다가가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행복의 첫 출발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물질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소유, 곧 그분의 힘과 은총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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