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0919 -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9 조회수87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9 19 () 가해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Tuesday of the Twenty-fourth Week in Ordinary Time
(성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티모테오 1 3,1-13 / 코린토 112,12-14.27-31
루카복음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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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 3,1-13

사랑하는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Reading 1


1 Tm 3:1-13

Beloved, this saying is trustworthy: whoever aspires to the office of bishop desires a noble task.
Therefore, a bishop must be irreproachable, married only once, temperate, self-controlled, decent, hospitable, able to teach, not a drunkard, not aggressive, but gentle, not contentious, not a lover of money.
He must manage his own household well, keeping his children under control with perfect dignity; for if a man does not know how to manage his own household, how can he take care of the Church of God?
He should not be a recent convert, so that he may not become conceited and thus incur the Devil's punishment.
He must also have a good reputation among outsiders, so that he may not fall into disgrace, the Devil's trap.

Similarly, deacons must be dignified, not deceitful, not addicted to drink, not greedy for sordid gain, holding fast to the mystery of the faith with a clear conscience.
Moreover, they should be tested first; then, if there is nothing against them, let them serve as deacons.
Women, similarly, should be dignified, not slanderers, but temperate and faithful in everything.
Deacons may be married only once and must manage their children and their households well.
Thus those who serve well as deacons gain good standing and much confidence in their faith in Christ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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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12,12-14.27-31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Reading 1


1 COR 12:12-14, 27-31A

Brothers and sisters:
As a body is one though it has many parts, and all the parts of the body, though many, are one body, so also Christ.
For in one Spirit we were all baptized into one Body, whether Jews or Greeks, slaves or free persons, and we were all given to drink of one Spirit.

Now the body is not a single part, but many.

Now you are Christ
s Body, and individually parts of it.
Some people God has designated in the Church to be, first, Apostles; second, prophets; third, teachers; then, mighty deeds; then gifts of healing, assistance, administration, and varieties of tongues.
Are all Apostles? Are all prophets? Are all teachers?
Do all work mighty deeds? Do all have gifts of healing?
Do all speak in tongues? Do all interpret?
Strive eagerly for the greatest spiritual gi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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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Gospel


Lk 7:11-17

Jesus journeyed to a city called Nain, and his disciples and a large crowd accompanied him.
As he drew near to the gate of the city, a man who had died was being carried out, the only son of his mother, and she was a widow.
A large crowd from the city was with her.
When the Lord saw her, he was moved with pity for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He stepped forward and touched the coffin; at this the bearers halted, and he said, "Young man, I tell you, arise!"
The dead man sat up and began to speak, and Jesus gave him to his mother.
Fear seized them all, and they glorified God, exclaiming, "A great prophet has arisen in our midst," and "God has visited his people."
This report about him spread through the whole of Judea and in all the surrounding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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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9 19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성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언제나 표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상여를 따라가는 과부의 모습과 그를 동정하는 마을 사람들의 행렬에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닌’ 한 인간이 겪는 삶의 현실을 엿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들은 죽음처럼 어두운 삶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고 예수님께 희망을 건 이들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의 만남은 자못 상징적입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일으키시며 당신께서 보여 주실 구원의 표징을 미리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과부는 자신의 생존의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대표합니다. 그녀를 지탱해 준 외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겪은 좌절감은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의 가엾은 마음을 ‘먼저’ 보셨고, 그녀에게 “울지 마라.”고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관습상 부정을 탈 수 있는 관에 손을 대기까지 하시며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말을 시작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이 모든 행위가 예수님의 전적인 주도 아래 이루어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놀라운 사랑을 통해 우리를 먼저 바라보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용서하시고, 손을 잡아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전하며, 이웃에게 다가서는 목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목자와 봉사자는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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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9 13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긴 과부를 만나십니다. 이 장면은 성모님이 십자가 앞에 서서 예수님의 죽음을 감내하는 모습과 교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을 미리 알고 과부를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과부의 슬픔과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죽음과 슬픔의 행렬생명과 기쁨의 행렬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적으로 유다인들에게 비판 받을 행동을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시신이나 그 관은 부정하다고 여겨 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공포와 저주를 사랑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파격적인 행동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역설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설교는 그분의 별명처럼황금 입’[金口]에서 나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지만, 성인은 권력자들의 부패와 위선을 끊임없이 비판하였기에 많은 박해를 받으시고 유배의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성인은 웅변가의 재능과 수사학의 기교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증언하고자 하셨습니다. 성인에게 성경 말씀은하느님의 지팡이요 보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항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은 어떠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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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 15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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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 16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나인이라는 고을로 들어가시려는 데, 마침 사람들이 죽은 젊은이의 관을 메고 그 어머니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한 성서학자가 잘 지적한 대로, 오늘 복음의 사건은 이처럼삶의 행렬죽음의 행렬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이삶과 죽음이 만나는 자리의 중심이십니다.
다른 기적 이야기와는 달리 여기서는 사람 편에서의 간구와 신앙이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주도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관에손을 대시어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신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에게는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 죽은 젊은이에게는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살아난 아들은 삶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삶과 죽음의 세계 모두의 주인이시며 죽음의 권세도 그분께는 복종한다는 것이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주권과 권능에서 우리는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 죽음을 이기시는 부활과 생명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봅니다. 다른 한편,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사용하신 것은 전적으로 그분께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와 연민이 죽은 외아들과 그 어머니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관점에 대한 가장 분명한 기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신 동시에 인간의 운명에 마음을 쓰시는 연민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하느님이 침묵하시고 무력하신 분,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단지철학자의 신인 것처럼 느껴지는 유혹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기적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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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 17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기념일)


메시아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무언가 선한 일을 하려는 동기는 옳지만, ‘자신이 그것을 해야 할 주체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사실 우리가 해결의 주체가 되는 것은 위험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가 아니라주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외아들의 상여를 뒤따라가는 과부를 만났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관에 손을 대시며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은 시신이나 관에 손을 대는 사람은 부정하게 됩니다(민수 19,11-22 참조). 또한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장례 행렬을 가로막는 것은 상당한 결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다른 결과로 드러납니다. 그분께서 부정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 부정함의 원천인 시신에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결례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가 주체가 되면 우리 자신이 부정하게 되기 쉽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결례를 일으키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오로지 주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체가 되시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실 때, 그저 그분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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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 18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표현주의 화가인 노르웨이의 뭉크(E. Munch)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고 가족의 잇따른 죽음으로 고통 받고 신경 쇠약을 앓았습니다. 그가 그린절규라는 그림은 자신의 아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의 배경인 윗부분에 있는 붉고 노란 노을은 불타는 것처럼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그림의 앞쪽은 한 사람이 양손으로 해골 같은 얼굴을 움켜쥐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절규하는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다리 위 조금 떨어진 곳에는 두 명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책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마을에서 상여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칩니다. 죽은 사람은 불쌍한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그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희망인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딱한 처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위로하신 뒤 상여에 손을 대시며 젊은이를 살리십니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곤경에 놓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해 주시는 인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어 합니다. 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다른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지쳐서 절규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곤경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귀담아들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도 가련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 따스한 신앙인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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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913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외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자식의 시신을 메고 가는 상여 뒤를 그 여인과 그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행렬 지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남편 없이 오로지 외아들에게만 희망을 두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산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이 슬퍼하며 상여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 여인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심정을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 씨는 오래 전, 남편을 잃은 지 석 달 만에 외아들마저 잃게 되었지요. 그는 십자가를 내동댕이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다고 그때의 순간을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납니다. 자신의 잘남과 능력을 믿고 살다가, 운명을 한 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만나는 순간,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결국은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 박완서 씨도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 후에 그는 신앙 산문집, 『한 말씀만 하소서』를 발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아들을 잃은 슬픈죽음의 행렬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외아들은 다시 살아나고 이제 그 행렬은 기쁨으로 가득 찬생명의 행렬로 바뀝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슬픈 운명은 결국 주님을 만날 때에만 위로받을 수 있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박완서 엘리사벳 님이 아름답게 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죽음의 행렬에서 예수님을 만나생명의 행렬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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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9 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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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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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16)
(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을 지나시다가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 동참하신 겁니다. 상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에서 성모님의 모습을 함께 보셨을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기적 앞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을 실감합니다. 죽음까지도 지배하시는 그분의 권능에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모셔 온 것은 어머니의 애절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청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성 김대건 신부님의 어머니는 ‘고 우르술라’입니다. 그분의 세속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836년 소년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발탁되자 어머니는 즉시 그를 보냅니다.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무엇을 다짐했겠습니까? 기도와 희생이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아들과 만나지 못한 채 애태우던 어머니 우르술라는 사제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이듬해에 잠시 상봉하지만, 몇 달 뒤에는 영원히 헤어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덤 곁을 지키다 1864 66세로 선종하지요. 지금은 아들이 잠든 미리내 성지에 함께 계십니다. 오늘날 김대건 신부님은 늘 우리 곁에 살아 계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헌신적인 기도가 늘 함께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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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1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동네에 이르시어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임을 아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분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게 하였을까요?
동정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각자의 깨달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원인은 분명 그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아들을 잃고 처연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인의 기적은 누구의 간청으로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아주 냉정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각자의 애환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차가운 심판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적인 슬픔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님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부모님의 사랑 앞에서는 숙연해지기 마련입니다. 나인의 기적은 어머니의 사랑이 정답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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