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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920 -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9 조회수87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년 09월 20일 (수) 가해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티모테오 1서 3,14-16 / 코린토 1서 12,31-13,13
루카복음 7,31-35



제 1독서 (홀수 해)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3,14-16

사랑하는 그대여, 14 나는 그대에게 곧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15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분께서는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습니다.



Reading 1
 


1 Tm 3:14-16
 

Beloved:
I am writing you, although I hope to visit you soon.
But if I should be delayed, you should know how to behave in the household of God, which is the Church of the living God, the pillar and foundation of truth.
Undeniably great is the mystery of devotion.

Who was manifested in the flesh, vindicated in the spirit, seen by angels, proclaimed to the Gentiles, believed in throughout the world, taken up in glory.



제 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Reading 1



1 COR 12:31-13:13


Brothers and sisters: Strive eagerly for the greatest spiritual gifts.

But I shall show you a still more excellent way.

If I speak in human and angelic tongues but do not have love, I am a resounding gong or a clashing cymbal.
And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omprehe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if I have all faith so as to move mountains, but do not have love, I am nothing.
If I give away everything I own, and if I hand my body over so that I may boast but do not have love, I gain nothing.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is not jealous, love is not pompous, it is not inflated, it is not rude, it does not seek its own interests, it is not quick-tempered, it does not brood over injury, it does not rejoice over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If there are prophecies, they will be brought to nothing; if tongues, they will cease; if knowledge, it will be brought to nothing.
For we know partially and we prophesy partially, but when the perfect comes, the partial will pass away.
When I was a child, I used to talk as a child, think as a child, reason as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aside childish things.
At present we see indistinctly, as in a mirror, but then face to face.
At present I know partially; then I shall know fully, as I am fully known.
So faith, hope, love remain,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복음
 


+ 루카복음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Gospel



Lk 7:31-35
 

Jesus said to the crowds: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For John the Baptist came neither eating food nor drinking wine, and you said, 'He is possessed by a demon.'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you said, 'Look, he is a glutton and a 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But wisdom is vindicated by all her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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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년 09월 20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진리란 누구에게나 타당한 삶의 지혜를 뜻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보편적이고 타당해도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한 복음의 진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나 이 진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는 말씀은 세상과 무관하게 자기 편견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단식하고 고행할 때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빈정대는 태도는, 어떤 일이든 비난과 반대를 위하여 자기주장을 절대화하는 독선과 아집의 끝판을 보는 듯싶습니다.
진리에 눈을 감고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리를 외면하다 보면 자기 합리화와 위선의 늪에 빠지고, 그런 거짓을 집단적인 이익과 관심을 위하여 진리로 위장하면 결국 거짓을 진실로 믿게 되는 망상에 빠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가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결국 옳다는 것은, 삶으로 신앙을 증언한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서 밝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일의 삶 안에서 십자가의 진리를 실천하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임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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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년 09월 14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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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년 09월 16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세례자 요한이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사람들은 그를 괴팍하고 심지어는 마귀 들렸다고 거부하고, 예수님께서는 빵도 포도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드시니 먹보요 술꾼이라고 하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결국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더욱이 믿을 마음도 없으니, 어느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고 또 듣지 않겠다는 심보입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매사에 반항하는 때가 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유익한 일을 하신다는 생각이 들어도 억지를 부리면서 이유 없이 불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꼭 마음에 들 경우에만 믿어야 할까요? 여러 종교들 가운데 가톨릭 교회의 교리가 마음에 들어서 믿으시는지요?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가 싫지 않은 데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까지 하셨기에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인지요? 조금 복잡하지요. 분명한 것은, 진리니까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마음에 들어서 믿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우리이지만, 그분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말씀이지만 따르려는 생각도 마음도 없고, 지키고 싶지 않은 계명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소개하는 장터의 아이들처럼 진리를 내 취향에 맞추려고 하거나 억지로 심술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떨쳐 버려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여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은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는 말씀으로 마감됩니다. 여기서 지혜의 자녀들이란,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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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년 09월 17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너무나도 유명한 ‘사랑의 찬가’입니다. 이 대목에 대한 뛰어난 해석과 설명을 우리는 자주 들었습니다. 오늘은 사랑에 관한 이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하고 아름다운 찬가가 본문의 어떤 맥락 속에 나오는지 관심을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
이 단락이 자리한 전체 본문의 주제는 은사의 식별과 사용에서 생기는 어려움과 갈등입니다. 이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협하는 매우 현실적이고 위중한 문제입니다. ‘사랑의 찬가’를 통해 바오로 사도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찬가의 바로 앞뒤 구절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격려한 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라고 말하며 사랑에 대해 알려 줍니다. ‘찬가’를 들려준 뒤에는 “사랑을 추구하십시오.”(1코린 14,1) 하며 단호하게 촉구합니다. 이어서 다시 성령의 은사를 구하라고 권유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사랑과 은사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의 의미가 드러나는 ‘길’이 바로 사랑이며, 은사를 청하기에 앞서 먼저 사랑의 ‘길’을 따르고 걸어가야 합니다. 은사는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청해야 하는 선물이며, 은사를 받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기 마련이며, 하느님에 ‘관한’ 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는 결국 하느님의 은사와 선물을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합니다. 그 참담한 결과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호소는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그 많은 선물을 과연 얼마나 세상과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사심 없이 선용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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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년 09월 18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시며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보좌 신부 때 이 말씀을 묵상하며 주일 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놀이를 마련해 주어도 그들은 그다지 신이 나는 것 같지 않았고,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어도 그들은 그다지 진지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를 않네?’
그런데 가만히 복음 안에 머무르면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대변하는 대리자이고, 청소년들은 그러한 저를 따라야 할 우매한 군중이라는 식의 발상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아이들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고, 오히려 그들의 기쁨은 별것 아니며 철없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무엇에 눈물을 흘리고 심각하게 여기는지, 그들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그저 저의 계획에 잘 따라오라고 강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신부님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신부님은 가슴을 치지 않네요.’
우리는 어떠합니까? 형제들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때 함께 기뻐해 주고, 눈물을 흘리실 때 함께 울어 주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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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년 09월 19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느님이 무서운 나머지 하느님을 피한답시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벌을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서운 심판관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로우시고 온화하신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의 식사 초대에도 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술을 드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셨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자유분방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였고, 자신들의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속에 감추어진 의도를 드러내시며, 하느님께서는 세리나 죄인들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시어 모든 사람을 다 품어 주시는 하늘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께 마음을 열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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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년 09월 14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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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년 0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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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년 09월 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세월은 결코 약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손쓰지 않으면 대부분 마음속에 감추며 살아갑니다. 그러고는 치유를 포기합니다. 부부로 살다 보면 누구나 만나는 시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아이 낳고 ‘부모로서’ 사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은 잠시뿐이고, 걱정과 기다림의 시간이 더 많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서 자식 가진 부모치고 마음 편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매일매일 숨이 가쁜 것이 부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이 ‘하느님의 지혜’일는지요? 결국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만큼 참으시는 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요한 세례자가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마귀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놀립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참으셨습니다.
그러니 인내하며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맡기는 행동이겠습니까? 그분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여야 맡기는 행동이 됩니다. 아픔과 상처를 그분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일 때 봉헌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자리하기’까지는 이렇듯 애절한 사연이 쌓여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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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년 09월 17일)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기념일)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이 대목은 예수님 시대의 동요였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변덕을 아이들의 노래에 빗대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시대 사람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좋으면 관심을 갖고, 싫으면 외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 중심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중심인 듯 행동합니다. 군중이 자기들만 따라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요한에게는 먹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고, 예수님께는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어디에나 있는 위험한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동하십니다. 정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남들이 믿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서 믿는 것입니다. 남이 ‘하라고 해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신앙생활입니다. ‘어쩔 수 없는 신앙’이 아니라 ‘자발적인 믿음’입니다. 떠밀려 가는 운명이 아니라 끌고 가는 운명이지요.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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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년 09월 19일)
(성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세월은 약이 아니라 마취제일 따름입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낫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는 대부분 처음부터 손쓰지 않으면 더 심해집니다.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 사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 있는가 하면 걱정도 참 많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길입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서 자식 둔 부모치고 마음 편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부모 역시 자녀 못지않게 매일매일 숨이 가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지혜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참는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말도 믿지 않고 당신도 믿지 않았음에도 그분께서는 참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아픔을 인내하며 그분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과 상처까지도 그분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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