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0928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28 조회수81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9 28 () 가해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Thursday of the Twenty-fifth Week in Ordinary Time

하까이서 1,1-8 / 코헬렛 1,2-11
루카복음 9,7-9

 

-------------------------------------------------

 

 

1독서 (홀수 해)


▥ 하까이서 1,1-8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Reading 1


Hg 1:1-8

On the first day of the sixth month in the second year of King Darius, The word of the LORD came through the prophet Haggai to the governor of Judah, Zerubbabel, son of Shealtiel, and to the high priest Joshua, son of Jehozadak:

Thus says the LORD of hosts:
This people says:
"The time has not yet come to rebuild the house of the LORD."
(Then this word of the LORD came through Haggai, the prophet:)
Is it time for you to dwell in your own paneled houses, while this house lies in ruins?

Now thus says the LORD of hosts:
Consider your ways!
You have sown much, but have brought in little; you have eaten, but have not been satisfied;
You have drunk, but have not been exhilarated; have clothed yourselves, but not been warmed;
And whoever earned wages earned them for a bag with holes in it.

Thus says the LORD of hosts:
Consider your ways!
Go up into the hill country; bring timber, and build the house That I may take pleasure in it and receive my glory, says the LORD.


 

-------------------------------------------------

 

 

1독서 (짝수 해)


▥ 코헬렛 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Reading 1


ECCL 1:2-11

Vanity of vanities, says Qoheleth, vanity of vanities! All things are vanity!
What profit has man from all the labor which he toils at under the sun?
One generation passes and another comes, but the world forever stays.
The sun rises and the sun goes down; then it presses on to the place where it rises.
Blowing now toward the south, then toward the north, the wind turns again and again, resuming its rounds.
All rivers go to the sea, yet never does the sea become full.
To the place where they go, the rivers keep on going.
All speech is labored; there is nothing one can say.
The eye is not satisfied with seeing nor is the ear satisfied with hearing.

What has been, that will be; what has been done, that will be done.
Nothing is new under the sun.
Even the thing of which we say,
See, this is new!has already existed in the ages that preceded us.
There is no remembrance of the men of old; nor of those to come will there be any remembrance among those who come after them.


 

-------------------------------------------------

 

 

복음


+ 루카복음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Gospel


Lk 9:7-9

Herod the tetrarch heard about all that was happening, and he was greatly perplexed because some were saying, "John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others were saying, "Elijah has appeared"; still others, "One of the ancient prophets has arisen."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9 28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성 벤체슬라오 순교자 기념일)
(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의 불안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외면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변해 줍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비행을 지적했던 세례자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걸림돌로 생각했으면서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딸 앞에서 공언한 허세를 이용해 세례자 요한을 처형합니다. 헤로데는 진리 앞에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등장은 그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 되어 불안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악행이나 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나의 삶의 바탕이자 근거인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선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악행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나의 행위와 생각들이 세상의 논리와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사람들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합리화의 유혹에 빠질 때,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은 나에게 걸림돌이고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진리에 눈을 감을 때 죄의 유혹과 불안감이 내 삶을 지배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진리였습니다. 나를 숙명처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근원들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비록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부유함의 안락을 누린다 하더라도, 내 영혼의 참된 평화와 안식은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가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교회가 주는 것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여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9 22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헤로데는 탐욕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에 젖어 살았기에,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는 소문에 집착했습니다. 한때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영험이 예수라는 자에게서 나오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회개를 요구하였습니다. 불같은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는 거짓 예언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하느님의 진리로 돌아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종종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법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이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을 견디어 내면 하늘 나라의 영광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헤로데처럼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허무의 심연 속에 빠져들지 맙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 24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을 두고 어떤 이들은 종말에 다시 오리라고 믿던 엘리야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만, 헤로데는 여러 가지 소문 가운데서도 유독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말에 신경을 씁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바른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죽일 때에도 몹시 괴로워하면서(마르 6,26 참조) 마지못해 목을 베었습니다. 죽이고 나서도 헤로데는 요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가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헤로데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16) 하고 되뇝니다. 이보다는 조금 누그러져 있지만 루카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에게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실제로 예수님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었습니다.
헤로데의 모습과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한 세례자 요한, 빌라도의 처신과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을 비교해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물으면서도(요한 18,38 참조) 진리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그들은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웠던 것은 세례자 요한이었고 예수님이셨습니다.
어쩌면 헤로데가 호기심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는지 모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헤로데도 빌라도도 호기심에서 물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호기심만으로 예수님이나 진리를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는 점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결코 아니시며, 그분을 만나 뵈려면 자캐오처럼 남다른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 25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성경의 인물 가운데 「코헬렛」의 저자가 가장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의 흐름을 관찰한 뒤 모든 것은 ‘허무’라고 결론짓는 그의 모습에는 우주의 원리와 인생사의 의미를 캐묻는 고대 철학자의 풍모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저자가 경험하고 확인하는 허무는 경험을 초월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허무이기에 학문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가며 넘어서야 할 삶의 과제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추상적인 사유를 목적으로 하는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구도자이자 실천가로서의 철학자라 하겠습니다. 그가 직면한 허무는 인간의 수고와 삶 전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코헬렛」을 읽다 보면, 참으로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으로 일관하는 ‘허무의 철학’에 도달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의 견해처럼, 철저한 현상 인식은 사람들이 순진하게 의지하는 피상적인 낙천주의를 벗겨 내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 저자는 진정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 업적과 소유, 지식, 쾌락 따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는 것을 알기에 먼저 그 환상을 깨야 했을 것입니다. 「코헬렛」 1장과 2장에서 말하듯,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알아볼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삶의 덧없음’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즐거움’(코헬 2,24 참조)에 눈을 뜰 때 주어질 것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 26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의 탄생과 활동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에게는 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유와 해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살의와 증오에 불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더욱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여기고 죽일 궁리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디딤돌이 되었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에게는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제2의 요한 세례자’일 뿐입니다. 눈엣가시였던, 자신의 불의와 불순을 드러내 알렸던, 자신의 치부를 폭로했던 걸림돌 중의 걸림돌인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정의 앞에서 헤로데가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그는 예수님의 출현으로 다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봅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받아 모시는 성체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지금 듣는 하느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언제나 우리의 삶을 한층 더 새롭게 해 주시는 디딤돌이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걸림돌로 받아들이게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의 잘못에 있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 27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요한 세례자와 엘리야는 공통점이 있는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권력자의 비행을 꾸짖었으며, 간악한 여인의 원한을 산 것도 똑같습니다. 헤로데가 자신의 불의를 고발하는 요한 세례자를 처치하자 군중들 사이에 예수님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 다시 되살아나신 분이라 하였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헤로데는 군중들 사이에 퍼진 소문을 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저버렸을 때 찾아오는 양심의 소리가 불안입니다. 헤로데는 회개하라는 요한 세례자의 진심 어린 충고를 무시하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권력자라 하더라도 죄를 지은 헤로데의 마음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에게 불편한 진리이셨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지만 대면하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둠 속에 자신을 숨깁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빛을 싫어하는 이유는 빛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고통을 피하고자 빛을 파괴하거나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럴수록 양심의 바늘은 자신을 더 아프게 찌릅니다. 죄를 짓고는 못 산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922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고대 벽화나 상형 문자에서는 아이들의 마음을 세모로 그리고 어른의 마음은 동그라미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픈 이유는 죄를 지을 때마다 세모꼴 양심이 회전하면서 뾰족한 모서리가 마음을 긁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두 번 범죄를 하면서 모서리는 점점 닳아 동그랗게 변하고 맙니다. 결국 어른이 되면 잘못을 해도 별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도 이렇게 날카로운 양심을 가진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과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이 어느덧 양심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습니다. 이제는 의인 요한의 생명을 잔칫상의 오락거리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헤로데에게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자신은 어둠 속에 사라지고 두려움과 정치적 생존 본능만이 번뜩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지은 죄를 되돌아보며 뉘우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 데 있습니다. 성찰과 정화의 시간이 없이 거듭되는 죄는 양심을 무뎌지게 하며, 양심이 무뎌지면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에서 좌표를 잃은 배처럼 우리는 제 모습을 잃고 표류하고 맙니다. 어느 날 문득 이전의 내가 아닌 낯선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헤로데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9 23)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에는 질긴 악연이 존재합니다. 이 악연은 주님의 탄생 전부터 시작되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의 악연은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의 관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평화와 불화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헤로데는 탐욕스럽고 권력에 젖어 사는 가련한 인생입니다. 명분과 체면의 틀을 깨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헤로데가 보기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요. 그러나 그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변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종교도, 정치도 백성이 없이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모두가 백성을 위한 행위이고, 백성이 참여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종교이고, 정치이지요.
헤로데는 그러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 드는 가련한 정치의 수장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24)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가 통치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을 보내 이스라엘을 지배했지만, 겉으로는 왕이 다스리는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임금은 ‘헤로데 안티파스’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과 부인 ‘헤로디아’를 비난한다고 요한 세례자를 죽게 했던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소문내자, 헤로데 임금은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주장에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신비스러운 사건’은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기적과 예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한번쯤 가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정말 ‘신비스러운 사건’은 성경 안에 넘치도록 있습니다. 성경의 기적에는 잠잠하면서 사람들의 소문에는 ‘혹한다면’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주변의 기적’에 눈떠야 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어디에나 기적의 꽃은 피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적에 놀랄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기적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주를 만드신 분을 모실 수 있습니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기적을 보고 예언을 들어도 ‘호기심의 만족’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의 모습은 많이 있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25)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나온 답변 중의 하나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마르 8,28 참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임금은 자신이 요한을 죽였다며,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다시 살아난 요한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율법에 어긋나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고는 아내의 간계에 넘어가 요한을 죽입니다.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방관했습니다.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십자가의 처형을 묵인하는 빌라도와 닮았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명분과 체면의 틀을 깨지 못하는 지도자들입니다.
내일의 복음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였습니다(루카 9,20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을 온몸으로 추종합니다.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명분과 체면이 아니라 열정과 희망으로 함께합니다.
이제 정치는 민중의 것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의로운 지도자들도 많아질 것이라 여겨집니다. 헤로데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나 베드로와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27)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영적으로 뛰어났던 분이 한 여인의 증오로 말미암아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헤로데 임금과 불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꾸짖자 그를 제거할 기회를 찾던 여인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성경에서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등장을 준비하였던 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부르짖었고 위선을 질책하는 직언으로 이스라엘을 뒤흔든 분입니다. 그러한 요한에게 편안한 죽음은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억울함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습니다. 그 죽음들이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야 억울한 죽음이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려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봉헌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었다는 봉헌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았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느님의 도구였을 따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