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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 2017년 10월 1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29 조회수1,928 추천수1 반대(0) 신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 2017101

이사, 66,10-14; 1코린 7,25-35; 마태 18, 1-5.

 

성녀 데레사는 프랑스의 비교적 부유한 중산층 가정의 9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19세기가 저물던 무렵입니다. 언니 두 사람이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자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입회하여 수도생활 9년 만에 스물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시대에도 열다섯 살에 수도원에 입회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어쩌다 있었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나고 1년 후 그 언니들이 그의 자전(自傳)적 수기(手記)를 출판하였습니다. 그 책은 교회 안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데레사 수녀 자신이 작은 길이라 부른 신앙생활에 대한 그 수기는 그 시대 신앙인들에게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는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16세기에 있었던 소위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유럽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 신앙에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 시대 신학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방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개신교가 자유로운 성서 독서를 신자들에게 권장하는 반면, 가톨릭교회는 로마 교황청의 해석에 준한 독서를 요구하였고, 엄격한 통제로써 신앙의 정통성을 지킨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개신교와 같은 분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안전 장치였습니다.

 

은총만으로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주장에 맞서서 가톨릭교회는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인간 공로(功勞)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은총은 우리가 쌓은 공로에 대한 대가(代價)와 같이 오해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행업(行業) 위주의 엄격한 윤리로 흘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행업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통회, 보속, 희생 등으로 표현된 그 시대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에 대해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그 수녀의 작은 길주장에 큰 영향을 준 것은로마서의 다음 구절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8,39). 구원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며 오로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9,15-16). 이 두 구절은 신앙은 인간의 행업(行業)이 아니라,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믿는 것이 핵심이고, 그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자기가 성서를 읽고 깨달은 대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영웅(英雄) 혹은 우상(偶像)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새로운 언어와 실천이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문자 안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신앙 체험을 읽어내어 자기들의 삶 안에 창의성(創意性) 있게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실천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남긴 언어와 실천은 우리에게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창의력을 자극합니다. 데레사 수녀는복음서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어린이라는 주제를 잘 조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 안에 독창적으로 실천하여 새로운 언어를 발생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이처럼 미성숙하게 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집안의 우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어린이는 약자였습니다.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어린이는 자기의 행업에 따라 부모가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부모가 베푸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고, 부모를 신뢰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은혜로움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부모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는 사랑하고 자비로운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다.”(요한 15,9). “내가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5,17).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쉽게 실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기적(利己的)이고 불안한 사람들이라 우리에게 유익(有益)한 것을 먼저 찾습니다. 사랑에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고받는 상거래(商去來)에는 준만큼 받는다는 보장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해타산에 밝고, 다른 사람들 앞에 자기의 우월함을 과시하면서 안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우월함이 긍정되고, 우리 자신이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중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죽어서 만날 분으로 우리의 삶에서는 밀려나 있습니다. 어린이라는 주제가 의미하는 바와는 다른 우리의 정신현실입니다.

 

어린이가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자기 위주로 살지도 말고, 자만자족하는 길을 찾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새로운 시야(視野)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고, 벌주기 위해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공로를 생각하지도, 찾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자녀와 함께 있는 부모와 같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자각(自覺)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고, 신뢰와 기쁨에 젖어서 살게 합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짓누르는 잡다한 근심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를 체험하게 합니다.

 

부모가 함께 있으면 자녀는 평화와 자유를 누립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자각은 신앙인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배우면서 사람 노릇을 합니다.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이 베푸셨듯이, 우리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의 몸짓 안에 그 형체를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만 생각하던 우리의 몸짓이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일을 행하는 몸짓으로 변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좀 더 기쁘고 신뢰로 가득 찬 것이 될 것입니다. 지키고, 바쳐서 더 많이 얻어내고 더 잘 되고 싶은 속물근성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롭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자녀의 진리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시는 하느님 생명이 하는 일을 자기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나타나게 하면서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삽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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