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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곡된 믿음(Faith), 무엇이 문제인가?
작성자이정기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29 조회수1,739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vs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로마서 10,9 각주번호 7()항 참조).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신 분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로마서 10,9 각주번호 7()항 참조). 그런데 라틴어 성경을 보면, 바오로가 쓴 서간문 중에 특히 로마서 3,22; 3,26; 갈라티아서 2,16; 2.20; 3,22; 필리피서 3,9 에 나오는 7 믿음은 라틴어 “fidem Jesu Christi” (또는 헬라어 “Pisteos Christou”)로써  현재 성경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들 성경구절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번역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러한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신자들이 비뚤어진 신앙을 갖게 됩니다. 첫째는 개신교에서  소위 종교개혁의 핵심 슬로건인 "오직 믿음" 이라는 교의(敎義) 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인간의 믿음으로 구속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믿음을 자랑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믿음을 자랑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말이죠(에페2,9 참조).  '오직 믿음' 교리에서는 '믿음'이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지칭하는 말인데, 바오로 사도가 성경에 기록한 믿음의 본뜻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을 의미합니다루터는 믿음으로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도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하였는데,  주석성경의 해석을 보면,  정작 이 믿음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오류인지요? 

 

최근 개신교 내에서도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 올랐습니다. 바오로에 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논자들이 주축이 되어 벌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관한 논쟁이 그것입니다(바울신학, 제임스 던,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14.8, 524쪽 참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이들이 개신교의 핵심교의인 이신 칭의(Sola Fide)'가 비 성경적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바 예삿일이 아닙니다본 필자는 그 개신교의 교의에 대해 가타부타할 의도는 없고, 다만 그들 신학자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내용과 소감을 잠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개신교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때 이때의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들 신학자들이 성경을 면밀히 검토해 보니, 루터가 오직 믿음교리를 만들 때 기초로 삼은 성경구절은 필자가 위에서 예를 든  7믿음인데 이 구절들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믿음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이신 칭의교의는 성경에 근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건의 원초적인 발단은 루터가 종교개혁 초기에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들 성경 구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인간의 믿음으로 잘못 번역하였고, 그 잘못된 번역에 기초하여 오직 믿음교리를 만들었으니 그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을 보면서 필자가 느낀 구체적인 의문은, 첫째는 개신교에서 주장해 온 바와 같이 과연 인간의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즉 인간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기가 믿기만 하면 죄가 없어지고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하는 구속에 관한 의문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 즉 하느님께 대한 순종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으로써 서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믿음인데, 과연 루터가 그 믿음의 차이를 모르고 성경을 번역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즉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 살고 있던 우리 인간을 그저 구속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코린1,30; 로마3,24 참조). 인간은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자기의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씻고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에페1,7 참조).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도 인간이 스스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에페2,8-9 참조).  만약 인간의 믿음으로 자신들의 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한 아담의 교만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창세3,5 참조). 그러니 인간의 믿음만으로 구속되었다는 논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라는 바오로에 관한 새 관점논자들의 논리가 올바르다고 판단됩니다. 더욱이 구속의 Mechanism을 보면 매우 확실해 집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예수님의 인성 안으로 옮겨주셨습니다(콜로1,13-14; 요한6,37 참조). 그런 다음 모든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구속을 가능케 한 수단은 예수님의 피이며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구속의 신비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재창조 된 것이라고 씨 에스 루이스도 그의 책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순전한 기독교, C.S. Lewis, 홍성사, 2015, 274-279쪽 참조).


두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바오로에 관한 새 관점논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개신교의 다른 신학자들은 루터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차이점을 몰랐을 리가 없고, 다만 오직 믿음으로 라는 종교개혁의 외침과 부합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믿음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자의적으로 번역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을 내 놓고 있습니다(김종길,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칭의론과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하여참조). 그러니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오역(誤譯)한 것과, 인간의 믿음으로는 구속이 불가능함에도 인위적인 행위인 인간의 믿음으로 구속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이신 칭의교의는 비 성경적이라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이러한 구속 교의와 관련하여 개신교의 명확한 입장표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의화(義化)’ vs ‘이신 칭의(以信稱義)’

    

인간이 자신들의 죄 씻음을 받고 의롭게 된 구속의 신비를 놓고 가톨릭교회는 의화, 개신교회에서는 이신 칭의 또는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같은 구속을 말하면서도, 그 해석은 완전히 다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정의하는 의화는 인류가 범한 모든 죄의 벌을 예수님께서 대속(代贖)하셔서, 인간이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일련의 과정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의화로 인해 죄인인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의인(義人)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가톨릭교회의 구속모델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트렌트공의회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점진적인 변형(Progressive Transformation)”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에서 정의하는 이신 칭의는 인간이 의롭게 된 것은 과정이 아닌 순간적인 하느님의 법정적 선언(Forensic Verdict)’이며, 이는 하느님이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는 의미로써, 본질상 인간은 죄인이지만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뿐이어서, ‘칭의로 인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緣由)로 해서 마르틴 루터는 이신 칭의를 인간이 의로우면서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성경에 부합한 해석일까요? 진리는 단 하나, 양쪽 다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이 구속으로 인해 의롭게 된 것은 법정(法廷)에서 판사의 선고문 같은 하느님의 선언이 아니며, 구속된 인간은 죄인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죄를 씻고 변화된 존재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올바릅니다. 즉 우리 인간의 생명은 구속신비를 통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로마5,18-19 참조). 그렇게 새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요한1,12). 성경의 기록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1코린1,3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1,7). "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5,17)."

    

성경의 기록은,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예수님의 나라로 옮겨주셔서 그분 안에서 살게 하셨다.”고 합니다(콜로1,13; 1코린1,30 참조). 그런 다음 예수님의 성혈(聖血)로 그들의 죄를 씻으시고(에페1,7), 예수님의 인성 안에 그들을 품고 계시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습니다(갈라2,1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우리 인간을 낳으셨습니다(천상의 책제13권 참조).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났는데 이러한 전 과정을 의화라고 합니다.

 

구속의 메커니즘은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그분의 피로 인간의 죄를 속량하셨기 때문에(로마8,3), 인간이 구속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는 과정(Imputation of sin)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죄의 전가 과정 없이 하느님이 인간을 어느 순간 죄 없다고 인정하셨다는 논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인간의 죄를 없애신 구속의 메커니즘(1코린1,30; 에페1,7 참조)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구속은 예수님의 강생시점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지속적인 속량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속량으로 과거,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태어날 인간의 모든 죄를 없애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심은 구속 사업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요한 19,30 참조). 그러면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갈라2,16)? 이 말은 예수님을 믿어야 비로소 구속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이미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성혈로 구속이 되었는데, 그러한 구속의 진리를 믿음으로써인간의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하여구속의 효력이 자신에게 미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바오로가 구속을 육적개념과 지적개념으로 구분해서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된 시기와 방법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신약성경 2코린5,21을 들어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인간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주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인간의 죄가 예수님께로 전가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들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추론에 불과하며 진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참된 진리는 예수님의 강생과 동시에 예수님의 인성 안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이 옮겨졌고(콜로1,13), 인간이 예수님 안에 살게 됨으로써 우리 인간의 죄와 죽음이 자연스럽게 예수님께로 전가되었으며(이사53,6),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다니셨습니다(요한1,29).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님의 태중에 잉태되셨고, 동시에 우리 인간은 예수님 안에 잉태되었습니다(천상의 책 제1294-2 참조). 그래서 이때 이중의 잉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동구속’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 안에서 살 때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믿음)이 아직 없었을 때였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의미입니다(1코린1,30; 에페1,7 참조). 즉 구속은, 우리 인간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즉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예수님 안에 살고 있던 인간을 예수님의 성혈로 그들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이 피는 바로 예수님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님이 예수님께 주신 피 입니다. 그래서 공동구속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즉 그분의 순종을 보시고 인류 구속 사명을 완수하게 하셨고, 동시에 그분 안에 있던 우리 인간을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5,19).”

 

독일, ‘경건주의 운동으로 설 자리를 잃은 이신 칭의교의

 

개신교 역사에서 볼 때, 루터의 오직 믿음교리는 루터 사망 이후 1세기경, 개신교의 교리와 예배가 형식주의로 빠져, 인간의 삶을 쇄신하지 못 함으로 인해서 독일 사회 전체가 부패되어 갔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경건주의 운동이라는 새로운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루터교에 속하는 필립 야콥 슈페너(1635-1705) 목사에 의해 제창되었는데, 루터 사망 후 정확히 130년 후인 1675년에 그가 쓴 책 <<경건한 열망, 교회개혁을 위한 제안들>>에서, 회생의 기운마저 사라진 개신교회에 6가지의 개혁대안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Teodore G. Tappert,

 

소극적으로는, 이 부흥은 교리와 예배와 삶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교회와 교인들은 (루터의)종교개혁의 최초의 충격이 사라진 후 이 형식주의에 빠졌었다. 적극적으로는, 이 부흥은 하느님의 심판과 은혜의 현실성을 깊이 깨닫게 하고, 이런 것들이 (개개인의) 사생활과 사회생활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믿도록 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경건한 열망, 9쪽 참조)”

 

중요한 사실은, 슈페너가 제시한 6개의 개혁대안 안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단 한 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개혁대안 2번을 보면 신자들이 영적 제사장이 되라.”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제사장은 실천을 인도하는 위치입니다.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공생을 시작하시며 회당에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이사61)실천을 주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그분을 닮아 실천을 보여야 함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또 대안 3항에서 신앙과 하느님 지식의 본질은 교리에 갇힌 것이 아니고 실천적인 신앙경험 속에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의 개혁 대안은 루터의 오직 믿음교의를 배격하고, 삶을 실질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강령들입니다. Tappert오직 믿음교의로 인해 실천이 없었던 형식적인 신앙행태를 한탄하고, 이러한 형식적인 신앙행태의 성찰로 부흥운동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창시자인 슈페너는 그의 책 말미에 다음과 같이 뼈아픈 자기성찰과 함께 비전을 제시합니다.

  

이 책이 우리가 앞에서 진심으로 한탄한 우리 교회의 파선된 상태를 크게 개선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당시의 교회 상황이 파선된 상태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개혁운동으로 실천 신앙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이는 루터의 이신 칭의교의가 성경의 참 진리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고, 신학은 실천적인 훈련이어서 실천만이 부서진 배(신앙의 쇄락)”를 수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작 본 고장에서는 이신 칭의교의가 사라진지 사실상 4세기가 지나가는데도, 한국의 유수한 교회에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보증이라고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신비주의” - 이신 칭의 비판

 

독일 태생으로 프랑스 국적의 A. 슈바이처 박사는 평생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펼친 의사로서 그리고 개신교 신학자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바오로 신학의 핵심인 예수님 안에서로 정의되는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Mysticism)>>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바오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Being-in-Christ)라는 그리스도 신비주의구속론이 주() 분화구이고, ‘칭의는 변두리에서 형성된 보조 분화구이다라고 하며 종교개혁자들의 이신 칭의교의를 평가 절하하고 있습니다(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Albert Schweitzer, The Jones Hopkins University Press, p.225 참조).

 

그는 바오로 사상을 깊이 연구한 후에 내린 결론으로, 종교개혁자들이 바오로의 서간문(로마서, 갈라티아서, 필립비서 등)을 기초로 이신 칭의논리를 구성하였으나, 그들이 바오로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만든 반쪽 이론이라며, ‘오직 믿음교리를 비판한 최초의 바오로에 관한 새 관점논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구속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저(freely) 이루어 졌음에도(로마3,24),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믿음에 의해 구속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의 구속위업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인위적(人爲的)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오로의 구속론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표상으로써, 구속에 있어서 의사 육적 개념(quasi-physical conception)지적 개념(intellectual conception)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지금까지 바오로의 연구는 일방적으로 후자의 지적 개념에만 국한 시켜서 해석해 왔다.(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he Jones Hopkins University Press, pp.219-220 참조)”

 

고 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바오로의 지적개념(intellectual conception)만으로 칭의론을 만들었고, 바오로 구속론의 기본 원인인 그리스도의 육적 개념 즉 그리스도의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신(로마8,3)” 원리를 무시하였다고 비판합니다. 그에 의하면, 구속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오로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바오로의 윤리적 권고나 믿는 자에 대한 충고들이 바오로 서간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종말론적인 긴장을 바오로 신학에서 제거해 버릴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바로 믿음만을 부르짖는 신앙이고, 종말론적 대망에서 사랑을 전제로 탄생한 바오로의 윤리사상을 간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울 강남에 한 유명한 교회를 세운 목사 한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옥 한음 목사였습니다. 그가 작고하기 얼마 전에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전 신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지난 수십 년간 신자수를 늘일 쉬운 방법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를 선포하여 교인들을 끌어 모음으로써, 성경에도 없는 값싼 구원론을 가르쳤다며 죽음 직전에 양심고백을 통해 하느님과 신자들에게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이분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올바른 진리의 길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서간문들에서 말하는 구속의 진리는, 예수님의 강생과 동시에 모든 인간을 예수님의 인성 안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잉태하신 후(콜로1,13)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루이사가 증언한 예수님의 말씀도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어머니 마리아님에게 잉태되면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모든 영혼들을 나와 함께 나 자신의 생명으로 잉태하였고, 또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내가 겪어야 할 고통과 죽음도 잉태하였다(천상의 책 제1294-2 참조)”

 

그런 다음 예수님은 그분 안에 살게 된 인간을 당신의 성혈로 그들을 구속하셨습니다(로마3,24; 1코린1,30; 에페1,7 참조). 바오로의 가르침은,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 인간의 믿음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아니며, 예수님 안에 살던 인간은 예수님의 피로써, 죄 씻음을 받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 구속(救贖)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 누림으로써 얻는 혜택은 죄의 용서와 더불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에 따른 새 생명과 새 삶이 이 의로움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공동구속(co-Redemption)에 대해 더 알고자 하시는 분은 필자가 쓴 "루이사의 증언-공동구속"-도서출판 맑은샘 을 

추천해 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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