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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930 -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30 조회수1,158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9 30 () 가해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Memorial of Saint Jerome, Priest and Doctor of the Church
Saturday of the Twenty-fifth Week in Ordinary Time

즈카르야서 2,5-9.14-15 / 코헬렛 11,9-12,8
루카복음 9,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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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즈카르야서 2,5-9.14-15

5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손에 측량줄을 쥔 사람이 하나 있었다. 6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그가 나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하고 대답하였다.
7
그때에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앞으로 나가자, 다른 천사가 그에게 마주 나와 8 말하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9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Reading 1


Zec 2:5-9, 14-15a

I, Zechariah, raised my eyes and looked: there was a man with a measuring line in his hand.
I asked, "Where are you going?"
He answered, "To measure Jerusalem, to see how great is its width and how great its length."

Then the angel who spoke with me advanced, and another angel came out to meet him and said to him, "Run, tell this to that young man: People will live in Jerusalem as though in open country, because of the multitude of men and beasts in her midst. But I will be for her an encircling wall of fire, says the LORD, and I will be the glory in her midst."

Sing and rejoice, O daughter Zion!
See, I am coming to dwell among you, says the LORD.
Many nations shall join themselves to the LORD on that day, and they shall be his people and he will dwell among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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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코헬렛 11,9-12,8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Reading 1


ECCL 11:9-12:8

Rejoice, O young man, while you are young and let your heart be glad in the days of your youth.
Follow the ways of your heart, the vision of your eyes;
Yet understand that as regards all this God will bring you to judgment.
Ward off grief from your heart and put away trouble from your presence, though the dawn of youth is fleeting.

Remember your Creator in the days of your youth, before the evil days come And the years approach of which you will say, I have no pleasure in them;
Before the sun is darkened, and the light, and the moon, and the stars, while the clouds return after the rain;
When the guardians of the house tremble, and the strong men are bent, And the grinders are idle because they are few, and they who look through the windows grow blind;
When the doors to the street are shut, and the sound of the mill is low;
When one waits for the chirp of a bird, but all the daughters of song are suppressed;
And one fears heights, and perils in the street;
When the almond tree blooms, and the locust grows sluggish and the caper berry is without effect,
Because man goes to his lasting home, and mourners go about the streets;
Before the silver cord is snapped and the golden bowl is broken,
And the pitcher is shattered at the spring, and the broken pulley falls into the well,
And the dust returns to the earth as it once was, and the life breath returns to God who gave it.

Vanity of vanities, says Qoheleth, all things are v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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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9,43-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Gospel


Lk 9:43b-45

While they were all amazed at his every deed, Jesus said to his disciples, "Pay attention to what I am telling you. The Son of Man is to be handed over to men."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aying; its meaning was hidden from them so that they should not understand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this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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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9 28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희망은 언제나 기대와 불안이라는 양날의 칼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은 현재를 긍정하고 살게 하지만,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희망을 기다림의 고문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의 기적과 권위 있는 가르침은, 기다렸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을까요? 제자들의 희망과 다른 결과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속마음을 미리 읽으신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성취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려고 예수님의 말씀에 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두려움으로 도망친 제자들의 절망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 희망이 되었습니다. 삶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상적인 나와 다른 현실의 나를 만나고, 확신 속에서 배신과 의심을 품게 되며, 실패와 좌절 속에서 새로운 꿈과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십자가 수난의 역설은 믿음이 성장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역설을 딛고 진리의 맛을 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희망입니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 역경과 고통 속에서 지혜가 자라나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날마다 초대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언제나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깨어 기도하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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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9 24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찬사를 보내고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찬물을 뿌리듯이 수난을 이야기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인정하기 싫었고, 그 상황이 실감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의인들의 죽음은 많았으며 그들에 대한 박해와 죽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시대에서도 종교 간의 충돌과 증오로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난민이 되고 고통과 죽음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 외면하고 싶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지구촌 가족인데 서로를 증오하고 피를 흘리게 하는 현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전쟁과 폭력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아들인 수난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을 기워 갚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노에 대해 온유함을 보여 주셨고, 증오에 사랑을,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보여 주신 길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여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겪어 낸 사람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귀담아들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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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 26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기념일)


다른 사람들이 모두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 예언자들은 그 순간 멸망의 위험을 알아보고, 모든 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 순간 희망의 불씨를 발견합니다.
기원전 519, 유배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성전도 재건되지 않았고 기대하던 회복과 구원이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때에 즈카르야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그가 본 첫째 환시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칠십 년이 되었는데도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시는 모습이었지만, 둘째 환시에서는 하느님께서 시온을 가엾이 여기시고, 셋째 환시에서는 분명하게 구원을 예고하십니다.
화답송에서 노래한 내용도 유다 왕국의 멸망을 선포하던 예레미야가 패망 이후에나 성취될 미래를 예고한 부분의 말씀인데, 여기서 그는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그 멸망이 끝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것을 전하는 내용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도 부활을 향한 여정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제자들마저 깨닫지 못합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면서 기뻐하는 이들에게 파멸을 선포하시고 그 멸망을 통해 쇄신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 당신을 메시아로 믿고 임금으로 세우려는 이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눈에는 받아들이는 것도 묻는 것조차도 두려운 신비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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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 27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오늘 제1독서의 「코헬렛」은 우리에게 ‘젊음의 날’에 즐기라고 권고하며, 허무를 인간 조건으로 안고 사는 우리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길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 ‘지금’ 즐기는 데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권고는 로마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유래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날을 잡아라!)이라는 격언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를 ‘쾌락주의’에 대한 권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이어지는 두 가지 구체적인 권고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하고 권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과 하느님을 알고 기억하는 것은 서로 다르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코헬렛」은 ‘젊음’이 상징하는 ‘현재’에 하느님을 경외하며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무는 것이 허무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체험하는 진정한 ‘삶의 기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자에게 ‘현재’는 ‘하느님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느끼는 행복’(코헬 2,24 참조)이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는 ‘현재’에 머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고통의 두려움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코헬렛」의 ‘행복의 철학’이 도달한 이러한 결론에 감탄하고 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답에는 여전히 허무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허무와 좌절을 넘어 근심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지난 일에 대한 감사와 앞날에 대한 희망 없이 그저 현재에 머무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누리는 현재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의 기억,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헌신하려는 결단, 나를 기다리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수렴되는 자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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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 28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성 벤체슬라오 순교자 기념일)
(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코헬 3,1-8).
구약 성경 코헬렛의 말씀을 길게 인용한 대로, 정말 그러한 것 같습니다.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쁜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쁜 때를 우리 삶에서 결코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때는 오지 않고 웃을 때만 오기를,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만 누리기를, 죽을 때는 오지 않고 늘 생명력을 느끼기를, 나쁜 때는 오지 않고 좋은 때만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좋은 때’를 맞이하셨습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에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이 제대로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수난의 때’를 예고하시며 미리 염두에 두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좋은 때라고 마냥 좋아하지 않으시고, 나쁜 때라고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떠한 때이든, 곧 그것이 좋은 때이든 나쁜 때이든 그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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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29일 전승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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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924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이청득심’(以廳得心)이라는 고사 성어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나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듣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조종하려는 태도 때문에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감적 경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자리에 서서 그 마음을 헤아리며 듣는 것을 말합니다. 공감하는 마음 없이 들을 때에는 상대방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소리나 모습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자랑을 하며 온갖 너스레를 떤다고 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듣는 사람에게는 금방 잘난 체하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나 공감적 경청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한 겹 깊은 곳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외로운 마음’이 들립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그 사람의 순수한 세계를 들을 수 있고, 마침내는 그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내면을 깊이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귀담아들어라.” 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분 마음 깊은 곳을 듣지 못하니 진리의 말씀이 들릴 리 없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을 들어주고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면 나눌 때 천국이 열립니다. 주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도 깊이 듣는 연습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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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9 25)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당신께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일러두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로 하신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입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고,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께 경탄을 보내던 사람들이 결국 주님을 팔아서 죽음의 손에 넘깁니다.
못 믿을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마저도 죽음에 부쳐 버립니다. 제자들 또한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 내십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어, 당신 생명에 참여시키십니다.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을 살려 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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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26)
(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기념일)


고려 말의 문익점은 사신을 수행해 원나라에 갑니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이 득세했습니다. 그런데 원나라는 공민왕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문익점에게 반기를 들라고 종용합니다. 그러면서 3년을 붙잡아 둡니다. 그는 그곳에서 목화 재배를 눈여겨보며 ‘고려의 춥게 사는’ 백성들을 생각합니다.
3
년 뒤 고려에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몰래 가져옵니다. 그러나 공민왕을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경남의 산청’에 유배됩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목화 재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면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합니다.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더라면 원나라에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귀양 갈 것을 알면서도 그는 목화씨를 가지고 왔습니다. 문익점은 ‘멀리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스승님께 해를 끼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멀리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보통 사람’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남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억울한 고통을 겪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부활은 ‘반전’입니다.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고, 억울함이 축복으로 바뀌는 ‘대반전’입니다. 부활을 희망하면 믿음은 삶의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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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27)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설마하니’ 하는 생각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 그렇게 당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마귀를 몰아내고 숱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스승님께서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한 사람이 어느 날 빈민촌으로 봉사 활동을 갔습니다. 어렵고 힘겹게 사는 이들을 보면서 그는 기도 중에 따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이들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무슨 잘못으로 아무런 기쁨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이들보다 더 불행하게 사는 이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정녕 못 본 체하십니까? 
그의 이러한 푸념이 끝나자 마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느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 비판의 화살을 보내는 인간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따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라도 건성으로 들으면 자신의 생각에 갇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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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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