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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07 -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 이기양 요셉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7 조회수747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7
10 07 () 가해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바룩서 4,5-12.27-29
루카복음 10,17-24


이기양 요셉 신부님


<
사랑하면 보입니다 >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이며 어떤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눈‘에 관해서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배우고, 많이 소유하고, 권력이 높은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가끔 신자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신부님도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없는 사람을 불편해 하는 우리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마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미쳤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했던 유다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들입니다. 신부들이 검소하게 지내면, 어떤 사람들은 궁상을 떤다고 말하고 조금 센스 있게 지내면 또 사치스럽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자기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권력이 높거나, 재산이 많거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보고 우러러 보는 것이 이 세상 풍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은 제대로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부유한 사람이고 제가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쥐고 있어도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인색한 사람이지요. 그에 비해서 풍요롭지는 않지만 이웃과 함께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 누가 더 부유한 사람이겠습니까? 이웃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지요. 하느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신부가 더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있어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없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쓸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도 이런 사람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사람을 대하는 기준은 세상과는 좀 다르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부유하고 지혜로운 사람, 또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는 많은 재산이나 높은 지위, 또 지식 그 자체만 지니고 있어도 우러름을 받습니다만 하느님 나라에서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모든 것을 다 놔두고 떠납니다. 오로지 남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얼마나 나누고 얼마나 함께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와 또 가족만을 위해서만 쓸 줄 알고 꽁꽁 싸 두었다가 그대로 다 놓고 죽어 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하기 때문에 나눌 수가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별반 없다 하더라도 그에 맞는 나눔을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오히려 하느님 보시기에는 가장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중요한 것은 볼 줄 아는 ‘눈‘입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요즈음 제 눈에는 성탄 트리 장식이 제일 많이 보입니다. 이번 구유와 성탄 장식에 대한 구상이 거의 마무리 되어갑니다만 관심이 있으니까 자꾸 눈에 뜨이는군요. 관심이 있으면 보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겠지요. 사랑하면 보입니다. 관심이란 사랑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루카 10,24)

그렇습니다. 옛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수천 년을 기다렸으나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는 하느님께서 오셔야지 볼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예수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도 알아볼 줄 모르고 깨닫지 못하였다면 똑같이 불행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수천 년을 기다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메시아를 알아 본 유다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님의 곁에는 목동 몇 사람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셨을 때에도 그토록 간절히 하느님 나라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입장에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이런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늘에서 내린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이 바라고 생각하는 메시아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욕망에 가득 차고 이기심에 부풀어서 메시아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가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옆에 와 계신 예수님도 볼 수가 없었는데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당에서도 똑같습니다.

사목자로서 신자들을 대하면 이 분은 이런 것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있구나 하는 것이 다 보입니다. 미사 중에 성체 분배를 아무리 빨리 해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느낌이 그대로 다 오는데 그것은 마치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그 식구의 기분을 알아맞히는 여러분과 흡사한 것입니다. 성체 분배를 17년간이나 해 왔는데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으며, 왜 사목자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지 대충 파악이 되지요.

예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도 만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은 각자 개개인의 장벽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단지 나의 욕심과 굳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뿐입니다.

3
년 전에 저는 성경 쓰기를 하는 우리 신자분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내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성경 말씀이 죽어있는 말씀인 것으로 알았는데 써 보니까 살아 계신 말씀이었으며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움직이신다는 것을 감격에 겨워 써 내려간 <성경 쓰기> 후기담을 피정하는 마음으로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성경 쓰기>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누누이 말씀드리고 독려하였지만 실제로 여기에 참여한 신자분은 한 30% 정도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도 마음과 생각이 내 방식대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차라리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이라면 따라 하면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으며 참 하느님 나라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때 참여하여 그 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제대로 행하지 않고 불평만 하며 이런 기회를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며,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의 조건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동참하며 기꺼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분명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이기양 요셉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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