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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08 - 가해 연중 제27주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8 조회수1,06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10 08 () 가해 연중 제27주일 복음 묵상

Twenty-seventh Sunday in Ordinary Time

이사야서 5,1-7
필리피서 4,6-9
마태오복음 21,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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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 이사야서 5,1-7

1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2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3
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 다오! 4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5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 6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어 가지치기도 못 하고 김매기도 못 하게 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게 하리라. 또 구름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7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Reading 1


Is 5:1-7

Let me now sing of my friend, my friend's song concerning his vineyard.
My friend had a vineyard on a fertile hillside; he spaded it, cleared it of stones, and planted the choicest vines; within it he built a watchtower, and hewed out a wine press.
Then he looked for the crop of grapes, but what it yielded was wild grapes.

Now, inhabitants of Jerusalem and people of Judah, judge between me and my vineyard:
What more was there to do for my vineyard that I had not done?
Why, when I looked for the crop of grapes, did it bring forth wild grapes?
Now, I will let you know what I mean to do with my vineyard: take away its hedge, give it to grazing, break through its wall, let it be trampled!
Yes, I will make it a ruin: it shall not be pruned or hoed, but overgrown with thorns and briers;
I will command the clouds not to send rain upon it.
The vineyard of the LORD of hosts is the house of Israel, and the people of Judah are his cherished plant; he looked for judgment, but see, bloodshed! for justice, but hark, the outc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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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4,6-9

형제 여러분,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8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9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Reading 2


Phil 4:6-9

Brothers and sisters:
Have no anxiety at all,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make your requests known to God.
Then the peace of God that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in Christ Jesus.

Finally, brothers and sist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honorable, whatever is jus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gracious, if there is any excellence and if there is anything worthy of praise, think about these things.
Keep on doing what you have learned and received and heard and seen in me.
Then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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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Gospel


Mt 21:33-43

Jesus said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Hear another parable. There was a landowner who planted a vineyard, put a hedge around it, dug a wine press in it, and built a tower. Then he leased it to tenants and went on a journey. When vintage time drew near, he sent his servants to the tenants to obtain his produce. But the tenants seized the servants and one they beat, another they killed, and a third they stoned. Again he sent other servants, more numerous than the first ones, but they treated them in the same way. Finally, he sent his son to them, thinking, 'They will respect my son.' But when the tenants saw the son, they said to one another,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acquire his inheritance.' They seized him,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and killed him. What will the owner of the vineyard do to those tenants when he comes?"
They answered him, "He will put those wretched men to a wretched death and lease his vineyard to other tenants who will give him the produce at the proper times."
Jesus said to them, "Did you never read in the Scriptures: The stone that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ornerstone; by the Lord has this been done, and it is wonderful in our eyes? Therefore, I say to you, the kingdom of God will be taken away from you and given to a people that will produce its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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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10 08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사야서 5,1-7
필리피서 4,6-9
마태오복음 21,33-43


혼인 잔치와 포도밭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단골 메뉴입니다. 그만큼 하늘 나라를 잘 표현하는 신학적인 깊이가 있는 비유입니다.
농부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밭을 만듭니다. 자신이 손수 공들여 만든 그 포도밭은 자신의 혼이 담겨 있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고, 마치 혼인 예식에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신부와도 같습니다. 그렇게 정성이 담긴 포도밭에서 농부는 당연히 좋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포도밭은 주인이 기다리는 결실을 안겨 주지 않고, 소작인의 배신이라는 통탄할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이 간단한 비유 안에 우리 인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용서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하는 인류의 부족함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사야 예언서와 예수님의 비유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포도밭 주인이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도록 내버려 두어 황폐하게 놓아두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다른 소작인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중책을 맡은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이고, 그 교회의 중심에는 집 짓는 이들에게는 버림받았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고, 우리가 구원받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도구로 부름을 받은 우리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되풀이할지, 아니면 새로운 소작인으로서 마지막 날에 제때에 소출을 잘 바칠 수 있을지는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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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1002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수호천사 기념일)

하바쿡서 1,2-3; 2,2-4
티모테오 2 1,6-8.13-14
루카복음 17,5-10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하바쿡 예언자의 외침은 시공간을 가르고 오늘날에도 전해집니다. 열심히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례하고, 봉사 활동을 하며, 기도를 열심히 해도 정작 세상은 별로 변하는 게 없어 보입니다. 불의한 세상은 변할 줄 모르고, 폭력은 여전히 세상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제자들의 호소는 우리의 가슴속에서 오늘도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설마 우리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조차 없을까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믿음이 겨자씨만도 못한 것이 아니라, 겨자씨보다 더 큰 불신과 미혹이 풍성한 나무가 될 겨자씨를 짓누르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고, 그것을 잘 간직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격려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목소리보다 주님의 목소리를 더 듣고자 할 때 성장하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은 이 땅의 평화를 지키는 군인들과 군 사목을 하는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군인 주일입니다. 교회가 군인들을 사목하는 이유는 국가의 안전을 위한 평화의 지킴이인 군인들을 격려해 주고, 그들이 국가에 봉사하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소명을 잊지 않도록 사목할 책임을 교회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군사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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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04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창세기 2,18-24
히브리서 2,9-11
마르코복음 10,2-16


오늘 전례 말씀은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에 대하여 가르침을 줍니다. 혼인은 남녀 간의 사랑의 계약만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기본 질서로서, 하나의 제도이며 신약에 와서는 칠성사 가운데 하나의 성사입니다. 혼인 안에서 남녀는 서로를 보호하고 상대방의 약점과 한계를 보완함으로써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뒤 그에게 온갖 짐승과 새를 데려다 주셨지만, 사람은 알맞은 협력자, 적합한 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은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남녀는 서로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배우자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남녀 구별 없이 인간은 똑같은 근원에서 나온 한 혈육이요, 그에 따른 공동 운명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아껴 주어야 한다고 제2독서도 강조합니다. 이 연대 의식, 공동체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인간에게 알맞은 협력자, 짝은 인간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더구나 혈연관계도 아닌 부부가 평생 사랑하는 것은 자녀나 형제나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더 큰 희생을 요구하지요. 그래서 요즈음 누군가에게 정을 주면서 상처를 입기보다는 차라리 반려동물을 기르거나 화초 등을 키우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기가 결코 쉽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느님께서 다른 어떤 동물이 아니라 오직 인간 때문에 당신의 창조 사업을 후회하셨지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알맞은 협력자”인 배우자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배우자를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신의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의 나날과 미래는 위안이 되고 희망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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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1005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사야서 5,1-7
필리피서 4,6-9
마태오복음 21,33-43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구세사 안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에 대한 반대자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에 선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비유가 이사야서와 시편의 두 가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에서 이러한 의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속적 박해의 역사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비유가 궁극적으로 보여 주려는 급박한 진실이 무엇이겠습니까? 스위스 출신의 신학자 라이문트 슈바거 신부는 『희생양은 필요한가?』에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해지고 현혹됨으로써 예수를 하느님의 계시자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예수의 역사적 행동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진리가 손상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완고함’과 ‘현혹됨’을 슈바거 신부는 모방 욕망에 따른 집단적 허위와 폭력의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 인용된 시편 118 22절의 말씀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에 비유 전체의 핵심적인 가치를 부여합니다. ‘내버린 돌’이 뜻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의 배척’이었고, 이는 오히려 집단적 현혹에 은폐되었던 진리가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의미에 대한 슈바거 신부의 결론은 이 말씀이 ‘그때 그들’ 못지않게 오늘의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공격성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계시를 통해서 이런 숨겨진 경향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결단에 직면하게 된다. ,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진실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그 진실을 ‘의도적인 완고함’ 속에서 거부하고 거짓말쟁이와 위선자가 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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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06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브루노 사제 기념일)

하바쿡서 1,2-3; 2,2-4
티모테오 2 1,6-8.13-14
루카복음 17,5-10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하느님께서 이에 응답해 주신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이를 하바쿡 예언자도 경험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그가 외칩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첫 번째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마약 중독자가 “주님, 저는 마약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마약을 주소서.” 하고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그 기도에 침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기도 지향부터 곰곰이 성찰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1독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말씀을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돌 판에 새길 정도의 정성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분께서 침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래판에 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도의 응답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1독서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곧, 우리가 바라는 응답의 때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때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한 알이 큰 나무가 되도록 성장시키시면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니 그 응답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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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07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기 2,18-24
히브리서 2,9-11
마르코복음 10,2-16


예수님께서는 남성 위주의 시대에 여인들을 존중해 주시며 인간의 품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이혼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의 두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면서 혼인의 근본적인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창조의 첫 번째 이야기는 남녀의 평등성입니다. 여자는 물건이 아니므로 남자의 재산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격체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평등하게 지어졌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평등합니다. 혼인이란 남녀 당사자들이 모두 하느님께 속한다는 사실에서 평등한 남녀의 결합입니다.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는 남녀의 보완성입니다. 남녀는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는 보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사고 속에 남아 있는 남성 우월주의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남녀의 평등이 없는 부부 사이는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동반자 의식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부족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서로 보완해 주고 약한 부분은 서로 책임져 줄 때 가정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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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1002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수호천사 기념일)

이사야서 5,1-7
필리피서 4,6-9
마태오복음 21,33-43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명동 주교좌성당은 바람 잘 날 없는 곳입니다. 한때는 강제로 쫓겨난 철거민의 피난처였고, 민주화를 외치는 장소였으며,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과 쫓기는 이들의 위로처였습니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명동 주교좌성당은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교회의 생명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충남 아산의 학() 마을에 이런 전설이 전해 온다고 합니다. 옛날 박 생원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죽은 학이 살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학의 둥지에서 이상한 돌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중국 상인들이 이 돌을 보고는 놀라면서 일천 금에 사겠다고 약속을 하고 돈을 가지러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박 생원은 횡재하였다고 기뻐하며 그 돌을 제값에 걸맞게 만든답시고 비단 수건에 싸고 흙을 털며 반질반질해지도록 날마다 닦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 중국에서 돈을 싣고 돌아온 상인들에게 그동안 잘 닦아서 소중히 보관한 돌을 보란 듯이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상인들은 크게 낙심하며 말했습니다. “이 돌은 혼을 다시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환혼석이라고 부르는 희귀한 돌이지요. 그런데 당신이 반들반들하게 닦는 사이 돌의 정기가 다 사라지고 말았소. 이제 이 돌은 그냥 평범한 돌일 뿐이오.” 그들은 혀를 차며 돌아갔습니다.
교회가 생명을 가지는 것은 번듯한 건물이나 잘 차려입은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힘없고 고통 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교회의 ‘모퉁잇돌’이 될 때입니다. 이런 정신을 잃고 나면 교회는 가진 자들의 향연, 생명 없는 친목 모임이 되고 맙니다. 우리 교회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멋진 건물에 앞서, 정의와 사랑을 위해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신앙인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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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03)

하바쿡서 1,2-3; 2,2-4
티모테오 2 1,6-8.13-14
루카복음 17,5-10


우리는 모두 하느님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학문으로 따지거나,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이론이나, 경제적인 단위가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일상을 오로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주님만을 믿으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믿음을 북돋아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주님께서는 우선 보잘것없는 믿음이라도 좋으니 신앙심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신앙심은 크거나 작은 그 무엇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믿고 우러르는 마음’입니다. 거기에 대소(大小)와 경중(輕重)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믿으면 온전히 믿는 것이고, 못 믿으면 온전히 믿지 않음만 있을 뿐입니다. 믿음에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엉거주춤한 태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일어날 정도의 변화도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세상이 주는 부와 명예 따위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주님께 목숨을 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세상에다 목숨을 걸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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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04)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창세기 2,18-24
히브리서 2,9-11
마르코복음 10,2-16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몸이 ‘한 사람의 몸’으로 바뀐다는 말씀입니다. 두 영혼이 ‘하나의 영혼’이 되고, 두 인격이 ‘하나의 인격’으로 묶인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운명이 그대의 운명과 같아졌으니, 생각할수록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모든 운명은 주님께서 좌우하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계산과 노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은총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앞날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기는 것이 언제라도 정석입니다. 당연히 ‘하나가 된’ 운명을 바꾸려는 생각보다 좋게 하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그토록 소중한 인연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어렵게 만나고는 쉽게 떠나려 합니다. 고통은 피하고 기쁨만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쉬운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삶은 본래부터 고통스러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번민과 괴로움은 ‘정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뀌었으니 고뇌는 당연한 일입니다. 인연이 주는 아픔이 반복되더라도, 주님께서 맺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한쪽이 흔들리더라도, ‘나는’ 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운명을 쥐고 계시는 주님께서 끝까지 잡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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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05)

이사야서 5,1-7
필리피서 4,6-9
마태오복음 21,33-43


복음 말씀은 어이없는 내용입니다. 어떤 지주가 포도밭을 일구고 포도주 공장까지 차린 뒤 세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용료를 내지 않습니다. 돈을 받으려 하인들을 보냈더니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가로채려 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동 역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를 죽이고 예수님 마저 없애려 한다는 지적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은혜를 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사건과 만남’이라는 예언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건을 통해 그분께서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고통스러운 사건일수록 그분의 말씀은 강렬했습니다.
만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연인 것 같아도 ‘분명한 뜻’이 담겨 있는 만남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지나고 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때의 느낌과 깨달음을 묻어 버리고 맙니다. 복음 말씀은 이런 삶을 돌아보라는 질책입니다
포도밭은 미래를 상징합니다. 생명과 함께 맡겨 주신 우리의 한평생을 뜻합니다. 그러니 인생의 소작료는 내야 합니다. 시간을 바치고 소유를 바치고 정열을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과 봉사 생활’은 다만 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봉사는 의무입니다. 할수록 은총을 만나게 되는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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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07)
(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하바쿡서 1,2-3; 2,2-4
티모테오 2 1,6-8.13-14
루카복음 17,5-10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마저 옮길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마태 17,20 참조). 정말 그럴까요? 사실 믿음 때문에 옮겨진 산은 없으나, 산처럼 강하고 꿈쩍하지 않던 것들도 믿음 때문에 움직인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입니다. 얼마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믿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말했다가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의 판단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라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돌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믿음으로 극복해 본 사람만이 ‘바다에 심겨지는 돌무화과나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보답은 언제나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만큼 기도했으니 이 정도는 주시겠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주십니다. 주시지 않을 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잘못 청하거나 불필요한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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