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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09 -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9 조회수94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10 09 () 가해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Monday of the Twenty-seventh Week in Ordinary Time
(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기념일)

요나서 1,1-2,1.11 / 갈라티아서 1,6-12
루카복음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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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요나서 1,1-2,1.11

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4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5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6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7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8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9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Reading 1


Jon 1:1?2:1-2, 11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that came to Jonah, son of Amittai:

"Set out for the great city of Nineveh, and preach against it; their wickedness has come up before me."
But Jonah made ready to flee to Tarshish away from the LORD.
He went down to Joppa, found a ship going to Tarshish, paid the fare, and went aboard to journey with them to Tarshish, away from the LORD.

The LORD, however, hurled a violent wind upon the sea, and in the furious tempest that arose the ship was on the point of breaking up.
Then the mariners became frightened and each one cried to his god.
To lighten the ship for themselves, they threw its cargo into the sea.
Meanwhile, Jonah had gone down into the hold of the ship, and lay there fast asleep.
The captain came to him and said, "What are you doing asleep? Rise up, call upon your God! Perhaps God will be mindful of us so that we may not perish."

Then they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ast lots to find out on whose account we have met with this misfortune."
So they cast lots, and thus singled out Jonah.
"Tell us," they said, "what is your business? Where do you come from? What is your country, and to what people do you belong?"
Jonah answered them, "I am a Hebrew, I worship the LORD, the God of heaven, who made the sea and the dry land."

Now the men were seized with great fear and said to him, "How could you do such a thing!
? They knew that he was fleeing from the LORD, because he had told them. ? They asked, "What shall we do with you, that the sea may quiet down for us?"
For the sea was growing more and more turbulent.
Jonah said to them, "Pick me up and throw me into the sea, that it may quiet down for you; since I know it is because of me that this violent storm has come upon you."

Still the men rowed hard to regain the land, but they could not, for the sea grew ever more turbulent.
Then they cried to the LORD: "We beseech you, O LORD, let us not perish for taking this man's life; do not charge us with shedding innocent blood, for you, LORD, have done as you saw fit."
Then they took Jonah and threw him into the sea, and the sea's raging abated.
Struck with great fear of the LORD, the men offered sacrifice and made vows to him.

But the LORD sent a large fish, that swallowed Jonah; and Jonah remained in the belly of the fish three days and three nights.
From the belly of the fish Jonah prayed to the LORD, his God.
Then the LORD commanded the fish to spew Jonah upon the sh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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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Reading 1


GAL 1:6-12

Brothers and sisters:
I am amazed that you are so quickly forsaking the one who called you by the grace of Christ for a different gospel (not that there is another).
But there are some who are disturbing you and wish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But even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to you a gospel other than the one that we preached to you, let that one be accursed!
As we have said before, and now I say again, if anyone preaches to you a gospel other than the one that you received, let that one be accursed!

Am I now currying favor with human beings or God?
Or am I seeking to please people?
If I were still trying to please people, I would not be a slave of Christ.

Now I want you to know, brothers and sisters, that the Gospel preached by me is not of human origin.
For I did not receive it from a human being, nor was I taught it, but it came through a revelation of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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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Gospel


Lk 10:25-37

There was a scholar of the law who stood up to test Jesus and said,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Jesus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 you read it?"
He said in reply,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He replie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But because he wished to justify himself, he said to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Jesus replied, "A man fell victim to robbers as he went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They stripped and beat him and went off leaving him half-dead. A priest happened to be going down that road, but when he saw him, he passed by on the opposite side. Likewise a Levite came to the place, and when he saw him, he passed by on the opposite side. But a Samaritan traveler who came upon him
was moved with compassion at the sight. He approached the victim, poured oil and wine over his wounds and bandaged them. Then he lifted him up on his own animal, took him to an inn, and cared for him.
The next day he took out two silver coins and gave them to the innkeeper with the instruction, 'Take care of him. If you spend more than what I have given you, I shall repay you on my way back.' Which of these three, in your opinion, was neighbor to the robbers' victim?"
He answered, "The one who treated him with mercy."
Jesus said to him, "Go and do likew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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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09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기념일)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논쟁을 시작합니다. 논쟁은 대개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시작하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613개의 율법 조항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 등 이른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쏟아 내는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까움은 단순한 거리상의 문제를 넘어 나와의 혈연관계로, 그리고 친분으로 가까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사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이교도, 이방인, 사마리아인, 또는 나와 관계없는 아무나가 나의 이웃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줍니다. 율법 교사가 적대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이지만, 그가 보여 준 행동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위기에 빠진 이웃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그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시간을 내어 주며, 자상하게 그를 돌보아 줍니다.
“오늘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당신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를 드러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하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이 그분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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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03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 그리고 불멸의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이유에서든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곁의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의 대명사인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넘어 인류 문명사에 이웃 사랑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 주는 이야기로 자주 회자됩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강해지는 우리 시대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위선적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리, 오로지 ‘가엾은 마음’ 하나로 아무런 편견과 조건 없이 애덕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복음이 지닌 놀라운 힘을 발견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다고 합니다. 최근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돌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핑계로 보편적 도덕심을 잃는 위기의 한국 사회를 볼 때,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자못 중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요청하는 애덕의 실천에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적 이유나 제한적 조건을 거는 것은 복음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사람인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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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05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요나와 율법 교사의 모습이 똑같아 보입니다. 율법 교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고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였습니다. 분명 그가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려고 합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본디 레위 19,18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동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요나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치는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모레 독서에서 밝혀집니다. 요나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용서하실 줄을 알았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시리아의 니네베 사람들에게 그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싫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지 않고 멀리 도망치려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지 따질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힘닿는 데까지 무조건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마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은 추상적이거나 아주 먼 곳에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곳,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해나 달이나 별을 따다 주어도 자기가 베푼 것은 아주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과묵하고 고독한 사람으로 소개되는 반면, 선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요나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잡신을 믿는 다른 사람들은 배 위에서 폭풍과 힘겹게 싸우면서 자기 신의 뜻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지만, 정통 신앙인 요나는 하느님의 뜻에 여전히 반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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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06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브루노 사제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명심해야 하는 말씀이지만, 믿지 않는 선의의 많은 사람도 이 말씀에 깊이 감동하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 비유의 보편적인 호소력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사랑의 계명을 감지하게 됩니다. 고통에 빠진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이나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어떤 높은 지위에 있든, 얼마나 많은 지식과 언변을 지녔든, 그는 가장 중요한 ‘인간다움’을 잃은 자입니다. ‘인간다움’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의 근원이자 행동의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써, 왜 우리가 그리도 자주 인간다움을 잃고 사는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나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상관없는, 굳이 마음 쓸 필요 없는 익명의 ‘타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마르티니 추기경은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와 가진 서면 대담에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우리 스스로를 성화하기 위한 이 세계는 존재에 관한 가치 중립적인 이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자연 현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 세계는 얼굴이라고 하는 이타성의 중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바라볼 얼굴, 존중할 얼굴, 어루만질 얼굴들이 존재하기에 우리 세계도 존재한다(마르티니·에코 공저,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서).
나와 무관한 ‘타인’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젠가 만날 ‘이웃’으로 존재합니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이웃의 얼굴’을 보는 것, 그것이 보편적 윤리입니다. 또한 그 윤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겨 주신 ‘사랑의 계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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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07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사랑이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애써서 고기를 잡아 보려고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루카 5,1-11 참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그 안에 새겨진 온갖 슬픔과 고독, 분노, 죄악,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그를 사랑하려고 애써도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깊은 데로 가시어 그물을 치시는 것입니다. 눈먼 이의 깊은 곳인 두 눈을 어루만져 주시고, 귀먹은 이에게는 그의 귀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나병 환자를 위해서는 그의 피부를 매만지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 모두의 깊은 곳, 곧 십자가상의 죽음에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사마리아인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쳤습니다. 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곧 강도를 만난 사람이 느꼈을 당황과 두려움, 절망, 분노, 가족에 대한 걱정, 강도에 대한 원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여러 가지 그물을 칩니다. 그 반면, 사제와 레위인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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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08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혼혈로 대부분 아시리아 식민지 사람들이었는데, 사마리아 함락 뒤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유다인 대신 사마리아로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은 인정했지만 예언자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신전까지 지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인들의 눈에 그들은 배교자였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들을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그들보다는 차라리 이교도를 더 좋아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의 본보기로 택하신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나 이방인에게 너그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들을 만난 사람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 준 진실한 사랑이 고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거울에 비추어 바라보기를 바라십니다. 신앙은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진심입니다. 진실함이 결여된 거짓 인격보다 보기 흉한 것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면을 쓰고 종교 생활을 하는 이들과 같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참된 힘이 됩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란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슴이 따듯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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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03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티벳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 싱’(1889-1929)이 직접 겪은 이야기입니다. 선다 싱이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동행자를 만났습니다. 동행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어느 노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다 싱이 동행자에게 노인이 길에서 얼어 죽을지 모르니 함께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행자는 버럭 화를 내며 “우리도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간다는 말이오?” 하고는 먼저 가 버렸습니다. 선다 싱은 그 노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노인을 혼자 등에 업고 눈보라 속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힘겨웠지만 노인은 선다 싱의 체온으로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고 마을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는 한 사내가 꽁꽁 언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살겠다고 먼저 떠난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가던 사제도 레위인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다인에게 멸시당하던 사마리아인만이 쓰러진 사람을 낫게 해 주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진정 누가 이웃이냐고 물으십니다.
선다 싱은 한 노인의 이웃이 되어 노인의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되기를 외면한 그 사내는 결국 목숨도 영혼도 다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한 이웃은 만나서 그저 수다나 떠는 대상이 아닙니다. 내 필요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그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전달되는 사람이 바로 내 이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내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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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04)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성 따위를 추구하는 사람도, 결국엔 건강과 생명을 보장받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건강과 생명을 담보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줌 바람에 날리는 먼지와 같은 인생살이에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세상의 것에 목숨을 내맡기려 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사마리아인이 베푼 ‘사랑의 실천’에 관한 비유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거창한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게 시작한다면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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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05)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시원하게’ 알려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답변은 평범한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목이 탑니다. 그러기에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실천으로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드셨습니다. 행동 없이는 깨달음도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마음먹는다고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실천하려는 이들의 ‘목표’입니다. 도달점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멍든’ 몸과 마음을 감싸 안는 일입니다. 그래도 살아야 하고 사랑하며 부딪쳐야 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치유하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라면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는지요? 너무 힘든 인생이 됩니다. 삶은 축복입니다. 따뜻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인생 역시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언제라도 이 세상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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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06)
(
성 브루노 사제 기념일)


‘스승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 학자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쉬운 길이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쓰여 있는지’ 되물으십니다.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할 것을 명하십니다. 쉬운 길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 된 어떤 이를 살려 주는 내용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모르는 사람을 사마리아인은 최선을 다해 살려 냅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는지요? 현실 안에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음먹고 결심한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일생을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삶의 목표를 그렇게 설정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보이는 이웃을 외면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도 외면하게 됩니다. 이웃이 싫어지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가까이해야 합니다. 이웃이 나를 싫어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훈련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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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08)


오늘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 된 사람을 구해 줍니다. 그는 치료비까지 주고는 말없이 떠나갑니다. 요즈음같이 삭막한 세상에서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시며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말씀하실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최고봉을 제시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완벽한 이웃 사랑인지 그 예를 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한 일은 사랑의 높은 단계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단번에 험하고 높은 산을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낮은 산부터 오르내리며 산에 대한 감각을 익혀야 하듯이,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번에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황새입니다.

남에게 너그러우려면 먼저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 사랑에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자신은 부정적으로 보면서 어떻게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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