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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09 -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 권지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9 조회수99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10 09 () 가해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요나서 1,1-2,1.11
루카복음 10,25-37


권지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누가 나의 이웃인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환절기에 모두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자기 동족인 유다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교사는 주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로써 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얘기는 간단합니다.
어떤 유다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라는 도시로 내려가다가 강도에게 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가엾게도 이 사람은 길가에서 신음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금 후, 그곳을 지나가던 어떤 사제가 그 사람을 보았지만 피해 가 버렸습니다. 그다음에는 레위사람이 그 사람을 보았지만, 또 피해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구해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 시대, 사마리아사람은 유다인과 앙숙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도저히 용서할 없는 유다인의 원수가 사마리아사람입니다. 이 원수가 유다인을 구해준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유다인들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이 받은 충격은 자기들이 이때까지 알고 있던 이웃의 개념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자기 동족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곧 자기 동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유다인들은 자기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미워했습니다. 유다인들은 다른 민족을 가리켜 ''라고도 불렀습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을 얼마나 멸시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얘기로 그들의 이웃 개념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도와 주기를 거부한 동족을 사마리아 사람이 돌보아주었다는 이 얘기는 역설적입니다. 이 역설적인 얘기로 편협한 그들의 형제사랑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역설적인 얘기로 예수님은 바로 보편적인 형제애를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감동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실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화된 우리는 물론 유다인처럼 좁은 의미로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구촌시대에 사는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이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모든 사람을 형제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 현대인은 정말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형제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가 던지는 현대적인 메시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무의식 중에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고, 그 좋고 싫음에 따라 나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해줍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좋고 싫음에 따라서 우리가 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더 이상 민족이나 피부색 때문에 사람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와 사랑은 분명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입맛에 따라 상대방을 좋아하고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입맛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동물을 보십시오! 동물도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좋아하고,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멀리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지 믿음에서 나온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중심적인 편협한 사랑보다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렇게 넓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이유를 마태 5,45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바로 이 말씀에 오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백인과 흑인, 동양인과 서양인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같은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형제지간입니다. 말이 아니라 바로 진짜 형제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하나의 아버지 밑에 같은 형제 사이라면, 우리는 누구를 제외시키지 말고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실 주님의 모든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같은 한 형제들. 또한 이것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권지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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