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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0.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9 조회수1,398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7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요나 1,1─2,1.11

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4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5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6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7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8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9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복음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

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미국의 어느 신학 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신학생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강론을 쓰라는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강의 시간에 발표를 할 것인데,

만약 강의시간에 늦게 들어오면

아무리 강론을 잘해도 낮은

점수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강하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강론을 발표하는 날,

강의실 근처에 아파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배치했고,

 강의실로 오는 신학생들이

아파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할 지를 실험했습니다. 
이 강의 전에 다른 강의가 있었기

때문에 신학생들은 강의실을

바쁘게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늦게 들어가면 낮은

점수를 맞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강의실 근처에 아파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신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대부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못 본 채 하거나,

 멀리 피해서 강의실로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늘 할 강론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것인데, 이 성경

구절에 등장하는 사제,

레위인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과연 열정을 다 쏟아서

강론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

 강론에 힘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담당 교수는 이 실험을 통해서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화에 나온 사제나 레위인이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는 그만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사제나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을 다녀온

사람으로 깨끗해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피는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또한 환자 역시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했었지요.

힘들게 예루살렘 성전을 다녀와서

깨끗해졌는데 다시 부정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의

마음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크기 때문에 반대쪽으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여관 주인에게 환자를

 부탁하는 것을 볼 때

그 역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즉, 사랑의 실천은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신분과 직업이

따라와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할

마음의 여유 없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각종 이유를 대면서 사랑할 수

없는 환경 탓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율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위지안)

빈센트 반 고흐의 '착한 사마리아인

"주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것"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중에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 것도

또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어내고

좋아하셨지 뭐가 되고 나서

좋아하시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너무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하려고 하면

넘어집니다.

우리는 작고 가난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겸손하게

기다릴 뿐이지요.

우리가 해야 하고 오직 하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의 먹을 것,

우리의 입을 것,

우리의 시간과 선의를

그것이 모자라는 이웃과

나누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교회 건물을

세우지도 않았고 시위를

주동하지도 않았으며

 학교를 창립하지도 않았으며

한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전쟁터에 가시지도 않았잖아요.”
이 소설책을 보면서 아주

인상 깊었던 구절입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고 좋아하셨지

뭐가 되고 좋아하시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삶을 산다고는 말만 하고

어쩌면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고

내 욕심만을 채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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