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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16 -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15 조회수98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10 16 () 가해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Monday of the Twenty-eighth Week in Ordinary Time
(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기념일)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기념일)

로마서 1,1-7 / 갈라티아서 4,22-24.26-27.31-5,1
루카복음 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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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1-7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3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Reading 1


Rom 1:1-7

Paul, a slave of Christ Jesus, called to be an Apostle and set apart for the Gospel of God, which he promised previously through his prophets in the holy Scriptures,
the Gospel about his Son, descended from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but established as Son of God in power 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 through resurrection from the dead, Jesus Christ our Lord.
Through him we have received the grace of apostleship, to bring about the obedience of faith, for the sake of his name, among all the Gentiles, among whom are you also, who are called to belong to Jesus Christ; to all the beloved of God in Rome, called to be holy.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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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4,22-24.26-27.31-5,1

형제 여러분,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에 따라 태어났고,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24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7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환성을 올려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자녀가 남편 가진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3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Reading 1


GAL 4:22-24, 26-27, 31?5:1

Brothers and sisters: It is written that Abraham had two sons, one by the slave woman and the other by the freeborn woman.

The son of the slave woman was born naturally, the son of the freeborn through a promise.
Now this is an allegory.
These women represent two covenants.
One was from Mount Sinai, bearing children for slavery; this is Hagar.
But the Jerusalem above is freeborn, and she is our mother.
For it is written:
Rejoice, you barren one who bore no children; break forth and shout, you who were not in labor; for more numerous are the children of the deserted one than of her who has a husband.
Therefore, brothers and sisters, we are children not of the slave woman but of the freeborn woman.

For freedom Christ set us free; so stand firm and do not submit again to the yoke of sla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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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Gospel


Lk 11:29-32

While still more people gathered in the crowd, Jesus said to them,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seeks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At the judgment the queen of the south will rise with the men of this generation and she will condemn them, because she ca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to hear the wisdom of Solomon, and there is something greater than Solomon here.
At the judgment the men of Nineveh will arise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because at the preaching of Jonah they repented, and there is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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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16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기념일)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기념일)



표징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보고 확신할 수 있도록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이나 평화, 정의 등과 같이 우리의 삶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표징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차릴 뿐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눈빛이나 말투, 몸짓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그 바탕에 신뢰의 마음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평화는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과 양보의 마음이 있어야 진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정의도 단순히 나의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줄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표징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그들이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 인류에게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신 표징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볼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니 그것을 알아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의미가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신뢰하는 오늘날, 신앙인에게는 표징의 깊은 뜻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이 더욱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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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 10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란 무엇일까요? 악한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의 선포일까요? 아니면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자비와 사랑의 부르심일까요? 그것은 요나의 모습 속에 잠시 들어가 보면 압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평하신 하느님답지 못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주님의 명을 거스르고 도망치지만, 풍랑을 만나고, 바다 속에 던져져서 고래 배 속에 사흘간 잠들어 있다가 결국 주님의 뜻대로 니네베로 보내집니다.
요나 안에 내가 있습니다. 내 판단과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면 하느님의 부당함과 그분의 자비가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여전히 잘살고, 양심을 지키는 이들이 무시당하는 불공평한 세상을 그냥 놓아두시는 하느님이 못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자란 나를 통해서도 당신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의 계명을 무시하고, 내 욕심대로 살아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곧바로 벌하지 않으십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불편한 윤리 규범이나 신자로서의 의무들이 못마땅할 때에는,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성당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속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우리의 아집을 곧바로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려는 것이었고,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도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한없이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넓은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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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 12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한 학기에 시험은 두 번 보았습니다. 중간고사를 기말고사보다 잘 보았으면 두 시험 점수의 평균이 그 학생의 성적이었지만, 만일 기말고사를 중간고사보다 잘 보았다면 실력이 향상된 것으로 인정하여 중간고사 점수는 넣지 않고 기말고사 점수만으로 성적을 주셨습니다.
회개한 죄인에 관한 문제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악하게 살다가 회심하여 하느님께 돌아왔다면, 그들의 삶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군중들에게, 불의와 폭력을 저질렀으나 요나의 설교에 회개하여 깨끗이 손을 씻은 니네베 사람들이 평생을 미지근하게 살아온 군중이나 신자들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공공연한 죄인이었다가 예수님께 용서를 받고 돌아와 그분을 깊이 사랑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봅니까? 예수님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어떤 사람은, 커다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신앙은 어떤 표징이나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과 체험을 통하여 이르게 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최대의 표징이요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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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 13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줄곧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징’ 밖에는 주어질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 세대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폐단을 우리 대부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아집과 탐욕과 분노로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황폐하게 만듭니다. 이웃과 진정한 친교를 나누기보다는 눈앞의 이익이나 시기심에 따라 그들을 대하기 일쑤이고, 약한 이들에게 정의와 애덕을 베풀기보다는 무시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대하기까지 합니다. 힘 있는 자들이 행하는 불의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한몫 보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요나의 표징’만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회심 없이는 세상의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스스로의 쇄신 없이 ‘악한 세대’가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헛된 기대에서 깨어나기를 분명히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대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요나의 표징’은 회개의 촉구일뿐더러 ‘예수님의 현존’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권력과 능력이 아니라 당신과의 오롯한 만남을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바뀌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도록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한 세대’에는 윤리적 죄만이 아니라 힘과 이익과 쾌락을 우선시하는 세상의 논리에 눈먼 우리의 불신앙도 포함됩니다. ‘요나의 표징’은 우리에게 죄와 불신앙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요나의 표징’은 다름 아닌 ‘자유의 표징’입니다. 참된 자유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 안에서 변화의 희망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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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 14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기념일)


언젠가 동료 사제들과 테니스를 치는 중에 허리 통증이 왔습니다. 몸풀기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계속 운동하였는데, 급기야 앉았다가 일어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한 주 넘게 물리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생하고 난 뒤 불현듯 제 자신이 제 몸을 소홀히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온 통증은 심각한 병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돌보라는 하나의 신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수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음에도 아무런 표징도 보지 못했다고 우기는 군중을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표징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많은 표징을 보고서도 변화되기는커녕 더 큰 표징을 요구할 따름이었습니다.
제 몸이 제게 올바른 몸 관리를 호소하며 신호를 보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시며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을 통하여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통하여 그 신호를 알아듣고 변화되었으며, 남방 여왕은 그 신호를 알아듣고자 솔로몬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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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 15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 축일을 지내는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혼란의 시기를 보내던 교회에 쇄신을 불러일으킨 분으로 유명합니다. 15-16세기는 교회에 어둠과 고통이 많았던 시기입니다. 어둠이 짙으면 별은 더욱 빛나듯이, 그 시대에는 뛰어난 성인들도 많았던 은총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빛나는 별 가운데 한 분이 예수의 데레사 성녀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길동무는 가난과 지병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나귀가 넘어지는 바람에 진흙탕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주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란다.” “네, 주님. 그래서 주님께는 친구가 많지 않은 겁니다.
데레사 성녀는 해이해진 수도원의 생활을 개혁하고 철저한 고행과 관상으로 참된 수도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는 동료와 주위 사람들에게서 끊임없는 반대와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녀는 이 모든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육체적 고통과 수도원 개혁에 대한 반대 등을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불굴의 투지로 이겨 내며 관상 수도회를 지켜 나갔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나서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것에도 평상심을 잃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며 인내는 모든 것을 이깁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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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10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 존경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사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칭찬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 / 찬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선택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조언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인기를 끌려는 욕망으로부터 / 모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 경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 질책당하는 고통의 두려움으로부터 / 비방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 잊히는 두려움으로부터 /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 우스꽝스러워지는 두려움으로부터 / 의심받는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
마더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살아 계실 때부터 이미 성인처럼 알려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셨지요. 그래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과, 한편으로 자신의 삶이 무너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이런 기도가 누구보다 더 절실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은 늘 이런 기도를 하며, 매순간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반복하며 살았으리라 짐작됩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첫 말씀이었고, 복음의 대부분의 내용은 회개와 관련이 있을 정도로 우리 구원을 위한 핵심 과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 죄를 짓고 살지 않는 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내적인 힘이 어디에 있는지 세세히 살펴보면 자신이 얼마나 회개하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며 살고 있어도 그 마음은 온갖 욕망에 사로잡혀 있거나 옹졸한 자기 생각에 빠져 있어서 정작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안 계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남들에게서 비방 당하고 질책 당할까 하는 두려움, 복음적 가치로 위장한 권력욕 등, 하느님이 아닌 위장된 거짓이 우리 삶을 지배하여 성실한 신앙인처럼 자신과 남을 속이고 있는 경우입니다.
회개는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을 식별하고 이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거짓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아직 우리 삶에 평화가 없다면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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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11)
(
성 요한 23세 교황 기념일)


요나 예언자는 처음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도 귀찮아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을 고비를 겪은 뒤, 요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합니다. 요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의 상징이 바로 니네베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요나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죽었다가 새롭게 태어난 요나를 통하여 니네베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의 기적을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 사건은 기적이라기 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이 빚어낸 혁명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회개한다는 것은 혁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주님께 되돌려 놓는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우리의 삶은 날마다 기적 속에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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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12)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불만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예언자가 되기 싫어 도망을 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끄심에 결국은 승복하고 ‘니네베’로 갑니다. 당시 니네베는 이방인의 큰 도시였습니다. 그가 할 일은 도시의 멸망을 예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회개합니다. 요나 역시 긴가민가하고 예언했는데, 니네베 사람들은 즉각 뉘우침의 단식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이방인들도 요나의 외침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가 ‘되기 싫어했던’ 사람의 설교를 감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조건을 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함을 꾸짖으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을 ‘악한 행동’으로 규정하고 계십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기적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매일매일을 ‘기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상의 기적’을 모르는 사람이 특별한 기적에 감동할 수는 없습니다. 신기해 할 수는 있어도 감동을 받지는 않습니다. 감동 역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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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13)


요나는 ‘요나 예언서’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만 외면합니다. 이방인 도시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외쳐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을 갑니다. 하느님을 피하기 위해 세상 끝에 있다는 도시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타지요.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가는 도중 폭풍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됩니다. 그러자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이 외칩니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요나 1,7).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렸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이후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느님에 의해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다 육지로 나오게 됩니다. 이제 요나는 옛날의 요나가 아닙니다. 전혀 새로워진 요나입니다. 이전의 요나는 바다에 던져질 때 죽었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의 표징은 부활을 뜻합니다. 아니 부활한 모습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꾸짖고 계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로 인해 회개했는데 어찌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도 미적거리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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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15)
(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요나의 표징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와 같이 당신도 죽음을 딛고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이며, 사람들은 결국 그 사건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남방 여왕이 되살아나 단죄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녀는 열왕기 상권 10장에 나오는 스바의 여왕으로, 솔로몬의 명성을 확인하고 조언을 듣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여인을 언급하고 있을까요?
여왕이 먼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목적은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보다는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왕은 솔로몬을 만나려고 돈과 시간을 투자한 반면에, 사람들은 그저 당연한 듯이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빈손으로 예수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왕이 그들을 단죄할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기적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기적의 장소에 가고 싶어 합니다. 비단 호기심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더욱 뜨겁게 기도하며 영적 목마름을 적셔 줄 시원한 체험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 잊고 있을까요? 미사를 통하여 기적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갈증을 해소해 줄 은총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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