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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초심으로 돌아가자!)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4 조회수1,548 추천수0 반대(0) 신고

 

"초심으로 돌아가자!"

찬미예수님!

한 주일 동안 별 일 없으셨습니까?

오늘 연중 25주일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예화 두 개를 소개합니다.

 [예화1]

첫 번째 예화의 제목은

'절벽에 매달린 총회장'입니다.

 궁금하죠? 총회장님이

왜 절벽에 매달렸을까?

어떤 본당의 회장님이 등산을

좋아해서 산악회에서

산을 갔다가 어쩌다가

일행을 놓쳐버렸어요.

깊은 산속에서 혼자서 헤매고,

날은 저물었는데,

막 헤매다가 절벽으로

미끄러진 것에요.

그냥 주르륵 떨어지니까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아이고, 나 죽네, 나 죽네.”

소리를 지르면서 절벽

밑으로 하면서 딱 하나,

나무뿌리 하나가

손에 잡힌 것에요.

그것에 대롱대롱 매달려가지고

위를 쳐다보고 “사람 살려,”

했지만 밤중에

누가 나타나겠어요?

그러다가 하늘에 대고

 “하느님, 듣고 계시면

저 좀 살려주세요.

예수님 저 좀 살려주세요.”

예수님이 주무시려고

샤워하다가 밖에서 소리가 들리니,

“누구여?” 하고 물으니,

“예. ㅇㅇㅇ 성당 총회장입니다.”

“아, 그런데 이 밤중에 왜 불러?”

“나무뿌리에 매달려있는

저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진짜 목숨 바쳐

하느님께 충성하렵니다.”

예수님께 쓰윽 내려다보시고

한마디 하시고 유리창 닫고

샤워하셨어.

그 한마디가 뭐냐?

“네가 붙들고 있는

그 나무뿌리 놔.”

세상에! 나무뿌리 놓으면

죽으라는 얘기인데..

조금 있다가 총회장이

다시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 말고

다른 사람 없어요?” 했대요.

 시간이 지나 손에 힘이

빠지고 썩은 나무뿌리가

뚝 부러지면서, ‘나 죽었다.’

하면서 떨어졌는데.

바로 땅바닥에 떨어졌죠.

 비탈 다 내려와 가지고

한 30센티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던 것에요.

얼마나 창피하고 쪽팔리고.

하느님이 알아서

손 놓으라고 할 때,

“주님, 죽이시든 살리시든

 주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손 놓겠습니다. 아멘.”

하면서 손 놓았으면

“아이고 장하다.

 내 자식, 나를 믿었구나!”

 하느님이 어련히 알아서

손 놓으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뭐라고 그랬다고요?

 ‘하느님 말고 다른 사람 없소?’

지금 그게 나올 말이에요?

 절벽에 매달린 회장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달랐죠.

마찬가지로 본당신부의

생각과 교우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아이와 어른의 생각이,

부모와 자식 간의 생각이

분명히 다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면,

하느님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느님의 생각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인간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을 몸뚱이는

주일날 잘 안 빠지고 나오지만,

오로지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은

비스무리 하지만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죠.

우리의 식대로 하느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든 회장은

‘하느님이 손 놓아라.’

하면 손 놓아야 돼요.

하얗게 알고 있던 종이를

까맣다고 얘기하시면

속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할지라고 무조건 예!

이게 신앙인이에요.

‘이게 어찌 까맣소?’

하고 눈 동그랗게 뜨고

덤비는 것이 종교인이에요.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계획하면

하느님은 부수신다.’

더 이상 계획을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퍼펙트하게 세웠다고

흐뭇해하는 순간,

하느님이 한 번 바람만 불면

그 계획이 다 무너집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아이고,

주님 제가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라는 고백을 들으시면,

그 즉시 주님이 목수가 되서

기초를 놓고 반석 위에다가

새로 집을 지어주신다는

얘기입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보다 늘 한 발

앞서 계신다.’

더 이상 내가 지혜로울 수

 없을 정도로 정말 현명하게

뭘 판단하고 뭘 하더라도,

하느님의 지혜는 내 지혜보다

늘 한 발 앞서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지혜가 뭔지 몰라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죠. 그렇죠?

따지는 것이 아니죠.

왜? 목자가 양을 절벽으로

끌고 갈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살아가게 하시거늘,

설마 우리를 잘못 끌고

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이끄심이 뭔지 몰라도

우리는 따라야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이 뭡니까?

일찍 와서 일한 일꾼이나

저녁 무렵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니까,

새벽같이 나와서 일한

일꾼들이

 ‘무슨 계산이 이렇습니까?’

하면서 밭주인에게 덤빕니다.

밭주인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뭐 잘못한 것 있냐?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안주면 나쁜 놈이지만

아침에 데리고 올 때부터

한 데나리온 준다고

그랬지 않느냐?

그리고 늦게 온 사람한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네가 상관이냐?”

 그리고 오늘 복음은

뭐로 끝납니까?

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아침 일찍 온 일꾼은

유대인을 늦게 온 일꾼은

이방인을 뜻합니다.

아침 일찍 온 일꾼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를,

늦게 온 일꾼은 세리나

창녀나 죄인을 뜻합니다.

아침 일찍 온 일꾼은

일찍 세례 받은 자,

늦게 온 일꾼은 늦게 세례

받은 자를 뜻할 수도 있겠죠.

 [예화2]

다음 예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엉망진창으로

살다가 죽어 천국 갈 기대도

안 했겠고 당연히

지옥으로 보내졌어요.

그런데 지옥에 가보니,

절대 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것에요.

자기 친구인데,

본당의 회장이었어요.

오늘 이상하게 본당 회장

시리즈지만 우리 회장님

얘기하는 것 아니니까

상처받지 마세요.

나야 당연히 지옥에 왔지만,

저 친구는 얼마나

열심히 한 친구인데..

쫓아가서,

 “자네가 여기에 어쩐 일이야?”

그 회장이, “조용히, 조용히,

떠들지 마! 이층에 주교님 계셔.

아래층에 본당신부님도 계셔.”

 이 풍자는

사제복 입고 산다고 해서,

 빨간 옷 입고 산다고 해서

천국보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오래 시간을 신자로

살았느냐나 직책에

좌우되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바로 뭐냐?

응답의 문제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성실하게 대답해야 해요.

대답만 하고 일하는

안 가는 인간은 엑스예요.

일도 하러 가야 되고

열매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실한 대답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구원은 시간과 직책의

문제가 아니라

응답의 문제이다.’

몸뚱이는 성당에 50년,

60년 다녔다고 하여도

 열매 맺은 것은

 눈곱만큼도 없고,

강론 들을 때만 천사처럼 듣고,

 성당만 나가면 헐크가 되고,

세상사람 마인드와 똑같이

눈곱만큼도 손해 안 보려고 하고,

베풀 줄 모르고,

과연 하느님은 그런 사람에게

구원을 허여할 것인가?

아니라는 거죠.

세례 받고 단 1년을 살다죽었다

해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응답하고 산 사람을 하느님은

선택한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왔잖아요? ‘

똑같이 줬다.’ 이겁니다.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새벽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밭주인은 불법을

저지는 것이 아니지요?

원래 약속했던 것을 떼어먹고

반 데나리온을 준다면

불법을 저지른 거지만,

밭주인은 일찍 온 사람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어요.

‘내가 내 것 준다.’ 은총은

 바로 그런 겁니다.

 타인이 받은 축복을

내가 받은 축복보다

더 크게 느낄 때, 우리는

내가 받은 축복 자체를

잃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다른 사람은

축복을 받고 살고,

나는 하는 것 마다 안 되고.

봉사는 내가 훨씬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도, 하느님은

사람 차별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이 받은 축복을

시샘할 때는 내가 받은 축복은

 아예 기억조차 못합니다.

감사를 망각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세 받았던 그날의

그 기쁨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르실료 받고 나왔을 때 눈물,

콧물 흘렸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피정 받고 회개하고

치유 받았던 피정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사제들도 사제 서품

받았던 바로 그 때,

그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고,

수녀들도 종신서원 할 때

그 아름다웠던 그날의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야 됩니다.

한 마디로 영적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나중에 이 김신부 죽어서,

 예수님 앞 심판대에 섰을 때,

“뭐 잘하고 왔냐?” 하시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어요.

저는 미사하면서 한 번도

정성 안 드린

미사를 해 본 적 없어요.

평일 강론이든 주일

강론이든 저는 기를 쓰고

늘 손 글씨를 써서 준비를 해요.

제의를 입으면서 내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제단 앞에 나가게 해 주십시오.

35년 동안 미사를 드려 이제는

떨리지 않을 때도 되었건만

해가 갈수록

미사드릴 때마다 떨려요.

특히 주님의 성체성혈을

축성할 때는 내 온몸의

세포가 우주를 향해 열려요.

 초심으로 돌아가라.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를 쓰고 노력해야죠.

성인성녀 되는 지름길은

다른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눈떠서 그날 하루를

마지막으로 사는 것밖에 없어요.

내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다,

내가 마지막 피정지도를 한다,

마지막 피정에 임하고 있다,

마지막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다,

마지막 성서를 읽고 있다.

마지막 독서자 노릇을 하고 있고

마지막 해설자 노릇을 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하는 복사다.

그런 마음이면 어찌 미사 때,

그리고 성체를 영할 때

어찌 감격의 눈물이

안 흘릴 수 있겠는가?

이 미사가 내 생애의 고별미사다,

그런 마음으로 사제도 제대에

서야 되고, 교우도 그런 마음으로

설 때 이 자리에 하느님 계십니다.

 다 같이 초심으로 돌아가자.

세례 받을 때,

 사제 서품 받았을 때,

여러 가지 교육을

하면서 벅차고

감격스러웠을 때의 마음,

그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추도록 합시다.

겉으로 보면 내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지만,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예.’ 하고 ‘아멘.’

 하며 결과만큼은 선하게

예비하실 거라는 것

믿도록 합시다. 아멘.

2017년 연중 제25주일(09/2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서운동성당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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