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1024 -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4 조회수1,271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10 24 () 가해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Tuesday of the Twenty-ninth Week in Ordinary Time

로마서 5,12.15.17-19.20-21 / 에페소서
2,12-22
루카복음 12,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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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5,12.15.17-19.20-21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5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Reading 1


Rom 5:12, 15b, 17-19, 20b-21 


Brothers and sisters:
Through one man sin entered the world, and through sin, death, and thus death came to all men, inasmuch as all sinned.

If by that one person's transgression the many died, how much more did the grace of God and the gracious gift of the one man Jesus Christ overflow for the many.
For if, by the transgression of the one, death came to reign through that one, how much more will those who receive the abundance of grace and the gift of justification come to reign in life through the one Jesus Christ.
In conclusion, just as through one transgression condemnation came upon all, so, through one righteous act acquittal and life came to all.
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Where sin increased, grace overflowed all the more, so that, as sin reigned in death, grace also might reign through justification for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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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2,12-22

형제 여러분,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Reading 1


EPH 2:12-22

Brothers and sisters:
You were at that time without Christ, alienated from the community of Israel and strangers to the covenants of promise, without hope and without God in the world.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off have become near by the Blood of Christ.

For he is our peace, he made both one and broke down the dividing wall of enmity, through his Flesh, abolishing the law with its commandments and legal claims, that he might create in himself one new person in place of the two, thus establishing peace, and might reconcile both with God, in one Body, through the cross, putting that enmity to death by it.
He came and preached peace to you who were far off and peace to those who were near,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in one Spirit to the Father.

So then you are no longer strangers and sojourners, but you are fellow citizens with the holy ones and members of the household of God, built up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apstone.
Through him the whole structure is held together and grows into a temple sacred in the Lord; in him you also are being built together into a dwelling place of God in th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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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Gospel


Lk 12:35-38

Jesus said to his disciples: 
"Gird your loins and light your lamps and be like servants who await their master's return from a wedding, ready to open immediately when he comes and knocks.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Amen, I say to you, he will gird himself, have them recline at table, and proceed to wait on them. And should he come in the second or third watch and find them prepared in this way, blessed are those serv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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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24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기념일)


우리의 인생은 늘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유아기 때는 앞으로 커서 학교에 잘 다닐 수 있도록 부모님께서 우리를 키워 주시고, 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 스스로 어른이 되어서 훌륭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혼인을 하면서는 앞으로 가정을 잘 꾸미고 자녀를 낳아 잘 기를 수 있도록, 또 그 시기가 지나면 노년의 삶이 평안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고 하느님과 만나게 될 영원한 행복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늘 내일을 함께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 있는 삶의 마지막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허무의 대상인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내일의 희망이며, 또한 그날을 준비하여 오늘을 충실히 살아갈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극적입니다.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린 종에게 주인이 내리는 상급입니다.
종 대신 오히려 띠를 매고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이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평생 동안 내일을 준비하며 날마다 열심히 살아왔고, 주님과 만날 날을 고대하며 열심히 달려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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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 18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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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 20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대신학교 1학년 신학원론 시간에 쪽지 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험 범위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한 부분이었고, 여러 문항 가운데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라고 말할 수 있다.”였습니다. 여러분도 맞혀 보세요! 정답은 ‘이면(裏面)’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원죄론과 로마서를 배우고 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출발점으로 하는 원죄 교리는, 인간 본성의 악함을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구원이 필요하고 예수님께서 그 구원을 넘치도록 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점이 바로 바오로 사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가 열렬한 바리사이였을 때에는 스스로 율법을 흠 없이 지키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을 찾지도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오로는 자신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잘 압니다(로마 7, 금요일 독서 참조). 이 깨달음이 그와 하느님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나의 의로움을 당연히 갚아 주셔야 하는 분이 아니라, 거저 베푸시는 당신의 은총으로 나를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80년이라는 인간의 수명은 당신께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실 그분을 철저하게 신뢰하면서, 그분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받아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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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21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허리에 띠를 매고 있으라.’는 오늘 복음의 첫 구절에 머무르며 묵상하고 새겨 본 다른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욥기 결말 부분의 도입부에서 하느님께서 절망에 빠진 욥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시며 거듭 던지시는 말씀입니다.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38,3; 40,7). 하느님께서는 욥이 괴로워하는 무죄한 이의 고통과 하느님의 정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초월성을 받아들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신비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틀에 박힌 신학적 답을 늘어놓는 욥의 비판자들 대신에,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31,35) 하고 처절하게 부르짖는 욥을 받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허리를 동여매라.’는 것은, 질타나 심판이 아니라 이제 고통과 자신의 한계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정화된 그가 주님과 함께 올곧은 길을 걸으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또 다른 명언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의 서사시 『신곡』의 「연옥」 편 첫 곡에서 카토가 단테의 허리에 띠를 둘러 주는 대목입니다. 카토는 공화정을 옹호한 로마 시대의 정치인입니다. 단테는 그를 ‘자유의 수호자’이자 정의와 절제, 용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높이 평가하며 연옥의 파수꾼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카토는 연옥의 여정을 시작하는 단테가 바르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 과정을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가서 저자에게 순수한 갈대를 둘러 주고, 그의 얼굴을 씻어 모든 더러움을 없애 주도록 하시오”(1 93-95). 연옥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갈대는 겸손을 상징하며, 카토가 갈대 끈을 단테의 허리에 둘러 주는 것은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겸허하게 정화의 길을 걸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동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욥과 단테가 체험했듯이, 절망에 빠지거나 자기만족에 빠지려는 위기와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이 참된 영적 여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은 우리를 깨우시고 용기를 불어넣으시는 사랑의 초대였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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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 10 2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기념일)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노예 제도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부유층이 적고 소작농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왕궁에서만 많은 노예를 거느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그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명망이 있으며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주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행복한 이유를 그다음에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정말 기막힌 반전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종을 시중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양반이 가장 낮은 종에게 시중을 듭니다. 가장 높은 이가 가장 낮은 이가 되고, 가장 낮은 이가 가장 높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위하여 시중하실 것을 믿고 희망하며 늘 깨어 기다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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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 10 23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1999, 서울대교구의 봉경종 신부는 백혈병과 일 년 넘게 투병하다가 45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그의 장례 미사 때에 동창 신부의 강론을 듣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이별이 주는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봉 신부가 투병하며 마지막으로 쓴 일기입니다. “이제부터 봉헌이다. 새로운 삶으로 가기 위한 봉헌을 잘 준비하자. 주님, 저를 온전히 받아 주십시오. 앞으로 ‘호스피스 케어’(임종을 앞둔 이가 받는 도움)를 받는 데 함께 도와주십시오. 당신을 향한 마음, 최후까지 흩어지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백혈병!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봉 신부는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하느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왜 제가 이런 병에 걸렸나요? 하필 왜 저입니까? 주님, 연세가 드신 부모님보다 오래 살게 해 주세요.” 그러나 그의 일기의 마지막은 “아멘.”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죽음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며 “아멘.”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종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깨어서 주인을 기다린다는 뜻은 무엇인가요? 주님을 끝까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온 삶을 주님께 기꺼이 봉헌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믿기에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봉 신부는 우리에게 참행복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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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18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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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19)
(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기념일)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당신의 피로, 십자가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의 대열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하나로 결합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평화이신 주님의 몸에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일구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평화를 일구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평화이신 주님을 기다립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이중적 삶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속한 사람, 주님께 속한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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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20)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복음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동한 주인이 종을 챙겨 준다는 내용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삶이 그것일는지요?
주인은 주님이시고, 종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깨어 있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인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내 뜻과 다를 경우, 내가 놓여 있는 ‘현실’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비탈에서도 잘 삽니다. 뿌리가 강한 탓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도 ‘소나무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바르게’ 살려는 이들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보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시련에서도 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삶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세상 역시 변덕이 심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소나무처럼 언제라도 ‘푸른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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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21)


어떤 삶이 깨어 있는 삶이겠습니까? 이웃과의 관계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족과는 잘 지내는데 이웃과는 잘못 지낸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족이 그를 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인내로 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가족이 자신을 대해 주듯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삶의 시작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두 얼굴을 지녔습니다. 선한 얼굴과 악한 얼굴입니다. 한없이 참을 줄 알면서도 건드리면 터지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너그러우면서 쩨쩨하고, 어질면서 옹졸하고, 푸근하면서 치사합니다. 이런 이중적 존재가 인간의 본질입니다. 타고난 천성이기에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들과 잘 지낼 수 있을는지요? 인내와 사랑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그렇게 잘 지내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종말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말을 위해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의 삶이 그대로 종말의 삶이 되는 것이지요. 종말은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훌륭하게 산 사람이 허망한 종말을 맞이할 리 없습니다. 평소 믿음의 길에 열심이었던 사람이 구원에서 제외될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미래는 주님께 맡기고 인내와 애정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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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23)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온종일 잠자지 않는다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젠가 하리라 마음먹고 있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언젠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다면 ‘지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와 어울리는 삶입니다.
시간뿐 아니라 장소에도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몸은 성당에 있는데 마음은 집에 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곳에서는 기도해야 하고, 일하는 곳에서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들을 잡고서 정신은 엉뚱한 데 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앞날을 걱정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룹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장차 다가올 일도 미리 만날 수는 없습니다. 어제는 그랬더라도 오늘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은 현재에 충실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실천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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