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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25 -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5 조회수1,288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10 25 () 가해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Wednesday of the Twenty-ninth Week in Ordinary Time

로마서 6,12-18 / 에페소서 3,2-12
루카복음 12,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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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6,12-18

형제 여러분, 12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Reading 1


Rom 6:12-18 


Brothers and sisters:
Sin must not reign over your mortal bodies so that you obey their desires.
And do not present the parts of your bodies to sin as weapons for wickedness, but present yourselves to God as raised from the dead to life and the parts of your bodies to God as weapons for righteousness. 
For sin is not to have any power over you, since you are not under the law but under grace.

What then? Shall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the law but under grace?
Of course not!
Do you not know that if you present yourselves to someone as obedient slaves,
you are slaves of the one you obey, either of sin, which leads to death, or of obedience, which leads to righteousness?
But thanks be to God that, although you were once slaves of sin, you have become obedient from the heart to the pattern of teaching to which you were entrusted.
Freed from sin, you have become slaves of righte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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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3,2-12

형제 여러분, 2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나에게 주신 은총의 직무를 여러분은 이미 들었을 줄 압니다. 3 앞에서 간단히 적은 바와 같이,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4 그래서 그 부분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하여 깨달은 것을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7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8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고, 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Reading 1


EPH 3:2-12

Brothers and sisters:
You have heard of the stewardship of God
s grace that was given to me for your benefit, namely, that the mystery was made known to me by revelation, as I have written briefly earlier.
When you read this you can understand my insight into the mystery of Christ, which was not made known to human beings in other generations as it has now been revealed to his holy Apostles and prophets by the Spirit, that the Gentiles are coheirs, members of the same Body, and copartners in the promise in Christ Jesus through the Gospel.

Of this I became a minister by the gift of God
s grace that was granted me in accord with the exercise of his power.
To me, the very least of all the holy ones, this grace was given, to preach to the Gentiles the inscrutable riches of Christ, and to bring to light for all what is the plan of the mystery hidden from ages past in God who created all things, so that the manifold wisdom of God might now be made known through the Church to the principalitie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s.
This was according to the eternal purpose that he accomplished in Christ Jesus our Lord, in whom we have boldness of speech and confidence of access through faith i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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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2,39-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Gospel


Lk 12:39-48
Jesus said to his disciples:
"Be sure of this: if the master of the house had known the hour when the thief was coming, he would not have let his house be broken into. You also must be prepared, 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

Then Peter said, "Lord, is this parable meant for us or for everyone?"
And the Lord replied, "Who, then, is the faithful and prudent steward whom the master will put in charge of his servants to distribute the food allowance at the proper time? Blessed is that servant whom his master on arrival finds doing so. Truly, I say to you, he will put him in charge of all his property. But if that servant says to himself, 'My master is delayed in coming,' and begins to beat the menservants and the maidservants, to eat and drink and get drunk, then that servant's master will come on an unexpected day and at an unknown hour and will punish the servant severely and assign him a place with the unfaithful. That servant who knew his master's will but did not make preparations nor act in accord with his will shall be beaten severely; and the servant who was ignorant of his master's will but acted in a way deserving of a severe beating shall be beaten only lightly. Much will be required of the person entrusted with much, and still more will be demanded of the person entrusted with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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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25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입니다. 반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는 원인과 결과를 따지며 자신의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립니다. 때로는 동료에게, 때로는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또 어떤 때는 정부나 교회 어른에게 그 탓을 돌리려 합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탓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좀 더 세심하게 자신의 약함을 살펴보고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의 표지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은 준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집사에 비유하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관리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관리자에게는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관리자에게 그에 맞는 권한도 주신 것입니다.
책임과 권한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움직입니다. 맡겨진 것이 많을수록, 또 그에 대한 권한이 많을수록 책임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의 균형이 맞지 않을 때, 특히 자신의 권한만 생각하고 책임감이 부족할 때, 나의 삶과 내가 속한 공동체의 균형이 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과거 어려웠던 시기의 역사가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 앞에서 우리의 불충실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늘 겸손함과 책임감으로 자신을 다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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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 19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기념일)


“깨어 있어라.”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처럼 잠든 사이에 도둑이 내 소중한 것을 앗아 가지 못하게 깨어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내 생각과 의식을 열어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내적인 성찰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영적인 ‘깨어 있음’을 한결같이 강조합니다.
영적 태만과 위선, 기회주의적 자기애는 영적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적당히 꾀를 내어 내 편안함과 욕심을 채우려는 종의 모습은, 남이 나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한 적당히 타협하면서 게으르고 위선적인 내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에 내 육신의 안락함이나 욕심보다는 주인의 생각과 뜻을 기다리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종의 모습이 칭찬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덜어 내고 비워 내는 비움의 영성, 곧 청정한 빈 마음의 ‘무아’(無我)와 ‘무욕’(無慾), 그리고 ‘무위’(無爲)의 삶은 종교인이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생의 끝자락에서 세상의 덧없음을 깨닫고, 욕망의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면 삶의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내 힘이나 노력이 아닌,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예수님의 복음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은 우리가 십자가의 빈 마음을 익히고, 믿음 안에서 확신을 갖고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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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 21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우리가 위령 미사에서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면서 “그는 세례를 통하여 성자의 죽음에 동참하였으니 그 부활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하고 올리는 기도문은 로마서 6장 앞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성자의 죽음에 동참했을까요? 그래서 그분의 부활도 함께 누리게 되리라고 바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에 순종하고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 세상에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지키려고 불의를 저지르거나 거짓을 감춘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죽지 못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커다란 죄악을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순간마다 해야 하는 수많은 선택에서 “죽을 몸”의 욕구에 좌우된다면, 아직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죄의 종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려면 그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잊은 셈이지요.
도둑처럼 들이닥치는 주님의 날, 또는 개인의 삶에서 마지막 날은 예기치 않은 결산의 날이 될 텐데, 주인이 떠나고 없는 동안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요. 더욱이 주인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완전히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며,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라는 격언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오늘도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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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22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기념일)


어제와 오늘 복음의 비유들은 제자들에게 필요한 내적 자세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 성서학자는 제자의 이러한 덕목을 ‘주의력’과 ‘책임성’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주의력’을 지닌 제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혼인 잔치’로 상징되는 하늘 나라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알아보는 이이며, 비록 ‘때’는 모른다 하더라도 ‘곧’ 사람의 아들이 돌아와 하늘 나라를 완성하시리라는 확신으로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어 오늘 복음에서는 ‘책임성’에 대해 성찰하게 됩니다.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책임성은 무엇보다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세속적 권력이나 사목적 권한을 주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했는지에 따라 주님께 ‘행복한 종’ 또는 ‘불충실한 종’으로 인정받는다고 오늘 복음의 비유는 말합니다.
그런데 ‘주의력’과 ‘책임성’을 갖는 데 실패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인의 부재’의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부재’가 항구적일지 일시적일지 ‘외적’으로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 가슴속에서 믿음과 불안과 의심이 뒤엉키게 되고, 어떠한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 그 기준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이 즐겨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선악과 진위의 분별이 어려운 ‘개와 늑대의 시간’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처럼 우리의 인생 또한 어찌 보면 주님께서 ‘부재’하시며,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고 모호한 시간 속에 놓여 있어 보입니다. 그러기에 주의력과 책임성을 가진 제자다운 판단보다는 눈앞의 이익과 허무한 욕망에 따라 사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오는 행복하고 충실한 종은 ‘주인의 부재’가 사실은 부재가 아니요, 그분께서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함께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기억하면서 의심과 태만의 유혹을 이겨 내고 믿음과 희망 속에서 주인과 ‘이미’ 함께하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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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 23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깨어 준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깨어 준비하는 자세인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올 때까지 늘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입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의 신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주인의 뜻에 따라 성실히 일합니다. 이러한 종에게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기게 됩니다. 곧 이 집사는 종으로서 충실한 대가로 주인에 버금가는 위치를 얻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이 늦게 온다고 여겨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집사입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주인만 없으면 자기가 주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온 것입니다. 곧 이 집사는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종입니다.
주인 행세를 하고자 했던 자는 도리어 쫓겨나고, 주인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고 자기 위치에 충실한 이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맡을 정도로 주인과 같은 위치를 얻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 이는 곧 ‘내가 하느님이 아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행세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하느님 행세를 하려 듭니다. 주어진 인생을 ‘내 마음대로’, 가족들을 ‘내 뜻대로’, 재산을 ‘내 방식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입니다.
우리 자신이 내키는 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나약한 나’로 말미암아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 옳다고 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깨어 있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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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 24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기념일)


오늘 복음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집주인이 집을 비우는 동안 모든 살림을 집사에게 맡겼습니다.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주인은 맡겨진 일을 충실하고 슬기롭게 처리했는지 점검할 것입니다.
충실하고 현명한 집사는 주인이 보지 않아도 식구들을 잘 보살펴 줍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면 집사에 대한 신임이 그만큼 두터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충실하지 못한 집사는 집주인이 없다고 해서 자기 혼자만 흥청대며 먹고 마시느라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소홀히 합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그 불충실한 집사를 그냥 둘 리 없을 것입니다. 맡은 일을 주인의 뜻대로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따라 상을 받거나 벌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맡아 충실하게 책임을 완수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흐뭇하게 여기시고 본인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우면 주님의 뜻도 거스르게 되고 결국 본인도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회 안의 다양한 직책은 모두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만 생각하여 직분을 남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잘못 판단하여 교회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집사의 처사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이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입니다.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주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주님과 더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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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19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기념일)


언젠가 임종하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호스피스 봉사자에게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임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특히 사제나 수도자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평생을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봉사하며 산 사람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자녀나 배우자도 없고 세상에 미련을 둘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일반 사람들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지요?
일반 사람들은 임종할 때 모습을 보면 대부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걱정하기보다 이승의 인연을 더 많이 걱정합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자식 걱정, 배우자에 대한 염려, 영원한 이별에 대한 고통과 아쉬움이 한껏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이 약할수록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제나 수도자는 세상 것에 미련이 없기에, 오히려 곧 닥칠 죽음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 짙게 밀려오는 것이겠지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 뜻을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가르치며 살았지만 아는 만큼 살지 못하여 막상 주님 앞에 나서려는 순간 더 많이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며 혼자서 힘겹게 고통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았던 사람일수록 죽음을 앞두고 더 많은 유혹에 시달리고 더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인들도 죽음 앞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하고 외치실 정도로 빈 하늘을 바라보시며 매우 고독한 상황을 표현하셨지요. 죽음은, 모든 사람이 그동안 입었던 옷을 벗고 벌거숭이로 주님을 만나야 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그가 입고 있던 옷이 고상할수록 벗어야 할 고통도 큽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고 비굴하고 죄스러움을 안고 살기에 주님 가까이에서 그분의 자비에 기대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나 수도자, 교회에 열심인 봉사자들을 세상을 초탈한 사람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약함을 통하여 일하시는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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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20)


도둑은 집주인이 알지 못하는 시간에 집을 뚫고 들어와 온갖 귀중한 것들을 훔쳐 갑니다. 만일 도둑이 언제 들어올지를 집주인이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었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도둑이 도망치거나, 집주인에게 덜미를 잡힐 것이니까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다시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어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집사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집사는 주인의 전권을 가지고 맡겨진 집안의 살림살이를 운영합니다. 이 과정에서 집사는 자신의 전권을 자기 마음대로 행사하여 집안의 분위기는 물론이고, 재산마저도 탕진하여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집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그 집사는 주인이 보기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충실하게 살지 않는다면, 깨어서 준비하며 살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 집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주님의 종, 주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이 충실하고 슬기롭지 못하면 결국 쫓겨나고 말겠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충실한 종답게 언제나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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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21)


시냇물 흐르는 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바닷물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각형에서는 누구나 네 개의 각을 가려냅니다. 하지만 둥근 원에도 ‘수억 개의 각’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작은 이익보다 큰 이익을 염두에 둡니다. 보통 사람은 ‘작은 이익’을 먼저 보지만, 그는 ‘큰 이익’을 먼저 봅니다. 보통 사람은 눈앞의 ‘현실’을 넘지 못하지만, 그 사람은 ‘미래’를 대비합니다. 그에게 미래는 결코 ‘먼 시간’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선명하게 미래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기준은 ‘준비하는 삶’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얼마만큼 열정을 갖고 사는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명성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잃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워렌 버핏’의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걸려 ‘신앙의 탑’을 쌓아 왔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정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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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22)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는 충실한 종입니다. 고대 사회에는 종들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대부분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입니다. 로마는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종과 노예는 주인에게 충실해야 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살았기에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주인을 위해 학문에 힘쓰기도 했고 자녀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주인의 이름으로 작품도 남겼고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솝 우화를 남긴 ‘이솝’도 그리스 출신의 노예였다고 합니다.
신앙인인 우리 역시 ‘주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소유와 관계’가 그것입니다. 풍성한 소유와 좋은 관계는 쉽게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라한 소유와 고통스러운 관계를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여기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의 재산을 맡길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소유와 관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하늘의 힘과 기운입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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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24)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기념일)


살다 보면 계획을 수정할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분명 계획대로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부딪힙니다. 신앙생활 역시 계획대로 될 때보다 수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계획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주님의 계획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때로는 그분의 이끄심이 당혹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실망스러운 결과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뒤에 돌아보면 얼마나 위험한 순간을 넘겼는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십니다. 매사를 주님과 연결하려 노력할 때 깨어 있는 삶으로 바뀝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길 때 깨어 있는 삶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분을 잊지 않아야 깨어 있는 삶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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