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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26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6 조회수1,61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10 26 () 가해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Thursday of the Twenty-ninth Week in Ordinary Time

로마서
6,19-23 / 에페소서 3,14-21
루카복음 12,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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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Reading 1


Rom 6:19-23 


Brothers and sisters:
I am speaking in human terms because of the weakness of your nature.
For just as you presented the parts of your bodies as slaves to impurity and to lawlessness for lawlessness, so now present them as slaves to righteousness for sanctification.
For when you were slaves of sin, you were free from righteousness.
But what profit did you get then from the things of which you are now ashamed? 
For the end of those things is death.
But now that you have been freed from sin and have become slaves of God, the benefit that you have leads to sanctification, and its end is eternal life.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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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3,14-21

형제 여러분, 14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Reading 1


EPH 3:14-21

Brothers and sisters:
I kneel before the Father, from whom every family in heaven and on earth is named, that he may grant you in accord with the riches of his glory to be strengthened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the inner self, and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that you, rooted and grounded in love,
may have strength to comprehend with all the holy ones what is the breadth and length and height and depth, and to know the love of Christ that surpasses knowledge, so that you may be filled with all the fullness of God.

Now to him who is able to accomplish far more than all we ask or imagine, by the power at work within us, 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and in Christ Jesus to all generations, forever and ever.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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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Gospel


Lk 12:49-53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 have come to set the earth on fire, and how I wish it were already blazing!
There is a baptism with which I must be baptized, and how great is my anguish until it is accomplished!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From now on a household of five will be divided,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a father will be divided against his son and a son against his father, a mother against her daughter and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 mother-in-law against her daughter-in-law and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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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26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무거워집니다. 당신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여 한데 모으러 오셨건만, 오히려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반대받는 표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당신의 직무를 회피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이 이 불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를 피해 가려고 거짓 평화를 앞세워 죽음을 피해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굳어 자신 안에 갇혀 버린 이 세상을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고난은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무관심한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삶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을 영화에 나오는 감상적이거나 비극적인 주인공처럼 만나고, 우리의 기도가 일상의 갈등과 고민들을 비껴간다면, 예수님께서는 더욱 우리의 삶에서 고립되고, 신앙은 우리의 삶과 유리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삶의 모든 고통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평화만을 찾기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이 아닌 ‘환상의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복음의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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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 20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믿음은 도전입니다. 이제까지 확신하고 살아온 세속적 가치들에 맞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에 대한 선택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겸허함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식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의 양보다 내가 모르고 살아온 하느님의 지혜의 엄청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는 회심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아집과 편견에 대한 도전이고, 동시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위험한 기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복음서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른다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말씀으로 ‘기억’해 내는 것이고, 이는 타성에 물든 내 옛 삶을 변화시키는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 개인의 회심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가 복음적이지 못한 가치들로 물들어 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동의 기억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한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함께 공감하는 동시에, 서로 힘을 합쳐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위험한 기억’을 해 낼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 세상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는 위험에 빠뜨리시고,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 안의 모순과 싸워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대조된 사회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진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 22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기념일)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이단 종파에서도 즐겨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그릇된 맹신에 빠졌을 때,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만류하고 반대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이단자들은 이 말씀을 내세우며 가족의 박해에 맞서 싸우라고 가르칩니다. 심한 경우, 자해를 하겠다고 소동을 벌이면서 가족을 위협하는 방법까지 교육시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들처럼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하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도 복음의 가르침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은 복음의 말씀이 참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복음을 몰랐더라면 세상이 옳게 돌아가는지 아닌지 묻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으면서 혼자 적당히 편안하게 살 텐데,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려면 악인의 뜻과 죄인의 길에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화답송 참조). 이러한 거부와 과감한 결단 없이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크고 작은 갈등과 어려움은 물론, 많은 시련과 인내, 충돌과 좌절, 급기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힘과 마음을 넓혀 주시어 쉽고 편한 길만 선택하지 않고 외롭고 고독한 길도 마다하지 않을 은총과 용기를 주시도록, 오늘도 마음을 모아 기도드립시다.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23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걸림돌’처럼 보이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그분의 위로와 치유에 목마른 우리에게 오히려 이 세상에 불을 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분열과 갈등, 주위 사람들과의 반목에 지쳐 주님께서 한순간에 이 모든 것을 화해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며 자문해 봅니다. ‘과연 내 안에서 타올라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혹시 평화와 평온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의 삶을 무덤처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은 이기심과 무사안일을 태우고 정화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타오르게 합니다. 나의 삶을 무덤으로 만들고 있는 피상적 관계와 내적 공허함은 ‘갈등’이라는 위기와 마주치면서 비로소 변화의 계기를 만납니다. 그러기에 불과 분열을 주시겠다는 것은 죽어 있는 가슴속의 갈망을 다시 샘솟게 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참생명을 체험하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십니다.
20
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독일의 칼 라너 신부가 올린 기도의 한 대목을 음미하며 사랑의 하느님과의 만남이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를 깊이 성찰해 봅니다.
“내 하느님, 오직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내 영혼의 문이 활짝 열려/ 내게 자유의 새 공기를 마시게 해 주시며/ 하찮은 자아를 잊어버리게 해 주십니다./ 사랑 안에서 내 전 존재는/ 궁핍과 공허의 포로로 만드는 나의 편협과/ 자아 긍정의 완고한 한계를 벗어나 여울져 흐릅니다. (중략) 당신이 사랑을 통해서 내 생명의 핵심이 되어 주실 때/ , 신비로운 하느님,/ 나는 당신께만 내 자신을 소진할 수 있으며/ 내가 품은 모든 의문도 불살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침묵 속의 만남』의 ‘내 생명의 하느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 24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기념일)


인생은 대체로 다음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로 보이는 유아기입니다. 두 번째는 친구가 세상의 전부로 보이는 청소년기입니다. 세 번째는 애인이나 배우자가 세상의 전부로 보이는 청년기입니다. 네 번째는 자녀를 세상의 전부로 보게 되는 중년기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완숙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자녀들의 독립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자녀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자기 인생은 그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시기에 바라보는 존재가 바로 절대자입니다. ‘나’의 인생을 시작하게 하시고, 이끌어 주시며, 그 인생을 마무리해 주시는 오직 단 하나의 존재, 곧 절대자에게 의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완숙기에 접어든 사람은 절대자를 통하여 세상을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이 말씀은 마치 ‘인생의 다섯 단계’에 대한 가르침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주님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며 ‘상대자’가 아닌 ‘절대자’에 대한 의탁이 인생의 완성임을 깨우치게 됩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전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 25일 전승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묵시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하시며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십니다. 즈카르야서에서는 “나는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리라.(13,9 참조)라고 하며 종말 때에 불로 심판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말라키서에서는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3,2 참조) 하고 말합니다. 이렇듯이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단하기 전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평화가 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하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결단을 내리고 나면 마음 안에 더 큰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불은 정화의 불입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불이 아니라 세상을 정제하여 깨끗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불입니다. 불로 정화되는 데 겪는 과정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려면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갈등과 번민으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주님의 뜻에 맡길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20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불이 세계 한복판에 내려왔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저를 붙잡고 저를 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저는 그것을 그냥 바라만 보거나, 굳은 믿음으로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그 열기가 더욱 올라가게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를 수 있도록 한 축성에, 있는 힘을 다하여 한몫을 했다면, 이제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은 영성체에 동의하고, 그렇게 하여, 그 불길이 저를 삼키고 저를 살라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테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의 주옥같은 글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샤르댕 신부님은 성체는 뜨겁게 타는 불덩이 같다고 했지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순간은 이렇게 주님의 불길이 우리의 온 자아를 태우고 삼켜 버리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가 사랑의 불꽃이 되어 뜨겁게 우리 삶을 봉헌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붙이시는 불꽃은 온전히 당신을 바쳐 이루신 성체성사의 사랑입니다. 세상이 온통 당신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랑의 불길로 완성을 향하여 진화해 나아갑니다.
한 순간이라도 불꽃처럼 살아 본 적이 있는지요?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쳐 본 적이 있는지요? 누군가를 위해서, 그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온전히 나를 내어 주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지요? 가슴이 아니라 눈에 불을 켜고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까요? 우리를 삼키는 하느님 사랑의 불꽃, 인생에서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런 불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지상에서 하느님과 하나 된 합일의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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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21)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불은 어지러운 세상을 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타오르는 불은 주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걸러 낼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가 곧 불의 세례이지요.
또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이시고 일치이신 분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얼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고, 주님께서 당신 날개 안에 모으시는 일치는 세상에서 말하는 일치와 다릅니다. 세상의 평화는 힘의 논리에 따른 것이고, 세상이 말하는 일치는 독재자의 횡포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지 결정하고,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우리는 그 즉시 참된 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와 모녀와 고부가 서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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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22)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기념일)


세상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도 복잡해졌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회생활은 분명 예전 같지 않습니다. 모임과 단체가 많아지고 의무 사항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정말 해야 할 일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은 포장이 요란합니다. 알맹이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평화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권태와 불안에 휘말릴 뿐입니다. 감사와 편안함보다 허영과 낭비가 느껴진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어둡고 습한 길’을 걸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련과 ‘망설임’은 서서히 불에 태워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신뢰’에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행동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희망입니다. 필요한 모임이라도 ‘이 사실’을 방해한다면 접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람이라도 박해자로 등장한다면 달리 처신해야 합니다. 복음 말씀은 가족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변화입니다. 불꽃의 점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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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23)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알아듣기 힘든 말씀입니다. 어찌 분열을 일으키려 오셨다 하시는지요? 그토록 일치와 평화를 말씀하시던 주님이 아니시던가요? 그런데 평화가 아니고 분열이라니요?
역사 안에는 예수님 때문에 생긴 분열이 많습니다. 가정이 갈라지고 가문이 쪼개진 예도 있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선택한 쪽이 우세했습니다. 다른 쪽을 포용했습니다. 하늘의 기운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역시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데 가족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가족에 대해선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승화시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로 가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맞서라고 하신 겁니다. 싸우고 투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집착의 끈’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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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25)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변화입니다. 그 불을 우리 각자 안에서 일으키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불은 서서히 타오르고, 작은 불이 결국은 거대한 산마저 태웁니다.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믿음이 나중에는 가족 모두가 입교하게 만듭니다. 박해를 받지만 결국은 박해를 하는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언제나 박해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입교한 뒤 가족의 반대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가족 모두를 입교시킨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면 반드시 보답이 주어집니다. 그 보답은 아무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집안을 변화시켜 새로운 집안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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