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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0.2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8 조회수1,788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7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제1독서 에페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복음 루카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아실 것입니다.

 엄청난 유대인들이

학살된 장소지요.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명령이라고 해도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독일 병사들은

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양심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학살을 할 때

마약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약을 먹은 것도 또 양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수용서 안에 하나만 놔두고

 모든 화장실을 없앴던 것이

결정적인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을 모두 이용할 수 없어서

수용소의 한적한 곳에서

급한 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끄럼 없이 아무데서

급한 일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디나 다 더러웠으니까요.

 점차 수용소 전체가 더러운

용변 자국으로 가득 찼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모습이

짐승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느끼자 독일군인들

역시 짐승 취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인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고 취급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 역시

그렇게 나를 대우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때,

리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아무런 능력과 힘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대우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뽑으셨을까요?

당시에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그리고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뽑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뽑으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 역시

 너무나도 소중한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를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또 존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될 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의 참된

 자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배경도 없고 힘이 없다고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의 자녀답게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즐기는 일이다.

그런데 현명한 사람들은

나중 것을 성취한다.

(로건 피어설 스미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카더라’

‘카더라’ 통신이라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불확실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서 사실인 척

이야기하면서 혼란을 주는

소식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글에서 봤는데,

‘카더라’라는 말을

칭찬할 때 쓰라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 그러더군.”으로

시작하는 칭찬법입니다.
“누가 그러던데.

자네가 가장 성실하고 훌륭하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던데.

형제님의 인상이 너무 좋대요.”
이런 식으로 칭찬하게 될 때,

뜬소문으로 골탕을 먹이는

‘카더라’ 통신이 오히려

커다란 힘을 얻게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도

이렇게 칭찬해보면 어떨까요?

저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던데요.

 여러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데요.”

어제 저녁, 묵주기도를 하면서 걸었던 길이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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