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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0.30 월/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9 조회수1,221 추천수6 반대(0) 신고




가해 연중 30주 월, 루카 13,10-17(17.10.30)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Cure of a crippled woman on the sabbath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까?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그곳에 있던 허리가 굽어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여인을 고쳐주십니다(13,11-13). 예수께서는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고 말씀하시면서 “손을 얹어주십니다.”(13,12-13) 곧 말씀과 행동으로 치유하시어 자유를 주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병에서 풀어주시자’ 그녀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13,13) 곧 해방이요 자유이신 하느님의 개입으로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했던’ 여인이 ‘똑바로 일어서는’ 창조의 역전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여인의 입에서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회당건물 안에’ 묶여있던 그 여인을 회당 밖, 영원의 때와 장소인 하느님께로 불러낸 셈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과 해방의 선물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우리도 늘 누구에게나 해방을 불러일으키는 힘 있는 메시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치유를 받은 그 여인이 병을 앓아온 “열여덟 해 동안”(13,11)은 창조와 생명을 거스르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깊이를 말합니다. 또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한’ 상태는 자유가 구속되고 창조 활동이 멈추어버려 ‘의미를 상실한 정지 상태’를 뜻합니다.

나 자신은 물론 우리 사회도 이런 고통 덩어리, 의미 상실의 상황을 경험하곤 하지요. 소유와 애착, 탐욕, 감사가 아닌 불필요한 말들로 인하여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바로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의 처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상황 한복판에서 '먼저' 하느님의 창조와 자비와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방식을 보면 놀랍습니다. 그분은 그런 처지에 있는 여인을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13,12) 치유해주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회당장은 짐승들을 학대하는 것을 싫어하여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게 해주면서도(13,15), 그토록 심각한 고통과 어둠을 불러온 그 여인의 병 치유를 문제 삼았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심각한 병고를 겪어왔던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13,16)이라 부르시면서 그 ‘존귀함’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사랑과 존중은 나로부터 해방되어 ‘타자’(他者)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으로 인하여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삶의 성사’요 ‘일상의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애정어린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상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런 사랑의 다가섬이 사랑의 치유를 일으킬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을 먼저 선택하여, ‘언제 어디서나’, 그들의 고통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최대의 존중심을 가지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보고 가까이 가서 부름으로써’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하느님의 자비와 해방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품고 먼저 달려가야 하는 곳은 고통과 빈곤과 갈등과 분열, 차별이 있는 바로 거기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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