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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0.3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30 조회수2,820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7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로마 8,12-17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 루카 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미국에서 자동차 판매를 하는

딜러 중에서 유독 실적이 좋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딜러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손님들은 거의 대부분 그에게

차를 구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사람들이

판매 실적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약간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 손잡이를 데워 놓으세요.”
날씨가 추운 지역에 살면서

 자동차 판매를 하는 이 딜러는

출근하자마자 헤어 드라이기로

자동차 손잡이를 적당히

데워 놓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요?

자동차를 구입하러 방문한

고객이 자동차 문을 열 때,

추운 날씨에 차가운 손잡이를

잡는 것보다는 따뜻함을

느껴지도록 배려한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손잡이를

통해서 자동차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져서 구입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실적 좋은 딜러가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배려가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놀라운 판매량을

가져온 것입니다.

 너무 작은 배려라면서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차피 추운 날씨이기에

 다시 차가워질 수 있으니

에너지만 낭비하는

행동이라면서 쓸데없는

배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배려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이렇게

작은 배려라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배려는 작아 보이지만

절대로 작지 않습니다.

커다란 사랑의 실천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커다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지 않습니까?

이 배려가 바로 주님께서

늘 강조하여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치유해주신 날이

문제였습니다.

어떠한 치료행위도

 할 수 없다는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이지요.

회당장의 외침처럼

병마에 시달리면서

열여덟 해를 버텼으니,

하루 늦게 치유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아픔을 보셨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 고생하면서

힘들어했던 아픔을 보시고는

하루라도 빨리 치유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배려 깊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당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율법이 사랑에

기초해 있는데,

율법 조항에만 매달려서

사랑을 외면했던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내 이웃을 어떻게

배려하고 있을까요?

물질적인 여유가 없다고,

시간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힘이 없다고... 이러한

이유들이 결국 주님으로부터

‘위선자’라고 들을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큰 슬픔을 인내하고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이룩해 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

(신영복)

어제도 결혼식 주례서고 왔습니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면서..."

학창 시절에 정말로

무서웠던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지금이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의 학창시절 때만 해도

선생님의 몽둥이 찜질은

아주 흔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께서는

다른 선생님보다도 매를

더 자주 들었습니다.

교실 안에서 조금만

떠들어도 매타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늘

조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한 번은 자율학습 시간에

옆의 친구가

제게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르쳐주는데,

선생님께서는 교실에서

떠들었다면서 앞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떠든 것이 아니라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가르쳐 준 것뿐이라고

말씀드렸지만,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답변과 함께 또 매를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고,

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또 혼날 수 있으니까요.
이러다보니 저희 반은

장난치는 아이 하나 없이

항상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도

저희 반이 가장 연학분위기가

좋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했고

또 각자 열심히 공부하는 반인

우리 반의 성적은 어떠했을까요?

전체 15개 반에서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조용했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성적은 좋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곳저곳 강의를

 다니다보니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강의 준비를 하면서도

잘 이해되지 않고 정리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하다보면

비로서 정리가 되고,

질문을 받아 답변을 하다보면

완벽하게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저희 반의 성적이

오르지 않았던 이유를 찾았지요.

바로 혼자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다보니

내 안에서 정리를 못했던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는 것처럼,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역시

내게 큰 도움이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 잘 몰랐던

부분을 이해하게 되고,

주님을 향해서 한발자국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년 갑곶성지 달력 사진 중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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