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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빵과 포도주----횔덜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31 조회수2,521 추천수0 반대(0) 신고

빵과 포도주

 

(빌헬름 하인제(Wilhelm Heinse)에게 바침)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후고(後考) 옮김

 

 

 

1.

 

 

 

땅거미가 내리면서 도시의 온 사방이 정적(靜寂)에 싸여 있다.

 

불 켜진 골목에는 침묵이 깔리고,

 

횃불로 장식된 마차들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고 있다.

 

오늘도 사람들은 즐거움을 실컷 맛보고 집으로 돌아가,

 

흡족한 기분으로 부지런히 득실을 따져보고 있다.

 

포도가게도 꽃가게도 선물가게도 닫혀 있다.

 

그러나 멀리 어느 뜰로부터 현악기(絃樂器) 소리가 들려온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켜고 있는 걸까,

 

아니면 외로운 사람이 멀리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켜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켜고 있는 걸까?

 

꽃 향기 가득한 화단 곁에선 끝없이 맑은 샘물소리를 내고 있고

 

땅거미 지는 하늘엔 종소리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고,

 

야경꾼은 매 시간마다 큰 소리 내어 외쳐댄다.

 

그리고는 한줄기 바람 불어와 작은 숲을 온통 흔들어놓는다.

 

달이 우리가 사는 지구의 그림자처럼 살며시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보아라!

 

별들을 가득 품은 채 우리에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지만,

 

신비스러운 밤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 가운데 한 낯선 사람처럼

 

산꼭대기 위로 놀라운 밤이 슬프고도 찬란한 빛을 비추고 있다.

 

 

 

2.

 

 

 

은총의 숭고한 밤이여,

 

그대가 손을 뻗쳐도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밤이 온 세상과 희망에 찬 사람들의 영혼을 움직이건만,

 

현자(賢者)도 밤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게 그대를 끔찍이 사랑하는 가장 위대한 신()의 뜻이므로

 

그대는 밤보다 분별할 수 있는 낮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티없이 맑은 눈도 어둠을 좋아하여

 

꼭 필요하지 않아도 기쁘게 잠을 청하기도 한다.

 

용감한 사람은 기꺼이 밤의 깊이도 알려고 한다.

 

어쩌면 밤에게 화환과 노래를 바치지 않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밤은 길 잃은 자, 죽은 자들에게 거룩하게 바쳐진 것이기에.

 

밤은 더없이 자유로운 정신 속에도 영원히 깃들어 있다.

 

그러나 밤은 머뭇거리는 이 순간을 위해서도

 

어둠 속에서 우리를 망각(妄却)과 거룩함에 빠질 수 있게 해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잠자지 않고 말을 쏟아내고,

 

더욱더 술잔을 가득 채우고, 인생을 더욱더 대담하게 살고,

 

성스러운 기억과 함께 밤에도 깨어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3.

 

 

 

스승이기도 하고 제자이기도 한 우리가

 

아무리 가슴 속에 속내를 감추거나

 

용솟음치는 용기를 억눌러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어느 누가 그것을 막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신성한 불꽃들은 밤낮으로 우리가 꿈을 이루도록 재촉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어서 열린 세상을 바라보고,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자신의 꿈을 찾아보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똑 같이 낮이 되거나 밤이 된다는 것이다.

 

낮과 밤은 모든 이에게 찾아오지만

 

저마다 다르게 느끼게 하지만,

 

꿈꾸는 자만이 꿈을 꿀 수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스러운 한밤중에

 

갑자기 기뻐 날뛰게 만드는 광기(狂氣)

 

시인들을 사로잡아 웃음거리를 만들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트모스(Isthmus)로 가려고 한다!

 

파르나스(Parnassus) 산 옆 광활한 대양이 철썩거리고

 

흰 눈이 델피(Delphian)의 절벽들을 환히 비추는 그곳으로 가려고 한다.

 

그 곳 올림푸스(Olympus)의 나라로, 그 곳 키테론(Cithaeron)의 산꼭대기로,

 

그 곳 가문비나무 아래로, 포도송이 늘어진 아래로 가려고 한다.

 

테베(Thebes)가 사는 카트모스(Cadmus) 나라의

 

이스메노스(Ismenos) 강으로 가려고 한다.

 

()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 돌려 가리키고 있는 그 곳으로 가려고 한다.

 

 

 

4.

 

 

 

모든 신()들의 집이 있는 거룩한 그리스여!

 

우리가 젊었을 때 들은 말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바다를 바닥으로 하고, 산들을 식탁으로 삼고 있던 연회실(宴會室)이여!

 

참으로 남다른 쓰임새를 위해 아득한 그 옛날에 지어졌구나!

 

그러나 옥좌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들을 즐겁게 해주던 신전(神殿),

 

과일즙을 가득 채웠던 그릇들은 어디로 가버리고

 

아무 노래도 들리지 않는다.

 

아주 먼 곳까지 전해졌던 말씀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델피(Delphi) 신전(神殿)은 졸고만 있으니,

 

그 위대한 섭리(攝理)는 어디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가?

 

온 세상을 덮고 있던 섭리는 어디로 가버렸나?

 

맑은 대기를 가르며 곳곳마다 행복을 뿌리면서

 

천둥처럼 우리의 눈 위로 들이닥치던 그 섭리는 어디로 가버렸나?

 

하느님 아버지!

 

그때만 해도 말씀이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졌고,

 

혼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나이다!

 

그땐 누구나 그런 행운을 함께 누리고 기뻐하며

 

무엇이든 낯선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어 가졌나이다.

 

그것이 기쁨이었으므로,

 

말씀의 위력은 잠자고 있을 때에도 커졌나이다!

 

아버지시여! 기쁨이여!

 

그 태고의 표징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 왔을 뿐 아니라

 

천상(天上)의 신()들도 찾아왔고, 그들의 낮이 그렇게 요동을 치며

 

어둠을 빠져 나와 인간에게 드리우고 있었나이다!

 

 

 

5.

 

 

 

신들이 처음 올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왔지만,

 

아이들은 되도록이면 신들 가까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신들의 영광은 너무나 찬란하고

 

너무나 눈이 부시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신들을 두려워하지만,

 

반신반인(半神半人, * 시인)조차도

 

선물을 가지고 다가오는 신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용기는 대단하다.

 

사람들의 기쁨은 반신반인을 흡족하게 만들었으나

 

반신반인은 제물(祭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하여 반신반인이 제물을 아무렇게나 낭비하고,

 

어리석게도 친절하게 축복의 손으로 어루만져

 

그만 성스럽지 못한 것들이 성스럽게 되어버렸다.

 

신들은 이를 참을 수 있는 한 참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신들이 곧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

 

인간들은 이 행운에, 대낮에 그들 앞에 나타난

 

신들의 얼굴을 보는 데 익숙하게 되었다.

 

옛날부터 한 분뿐이라고 했던 그 신들의 얼굴을 보는 데 익숙해졌던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넘치도록 기쁨을 가득 채워주었으며,

 

처음에는 모든 사람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켜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좋은 일이 생기게 하고 선물을 주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을 먼저 사용해보고 난 다음에야

 

가장 소중한 자신의 것이라 불렀다.

 

그래야만 마치 꽃을 보고야 칭송하는 것처럼

 

찬양의 말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

 

 

 

이제서야 사람들은 거룩한 신들을 진심으로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모든 일과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나이다.

 

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아무도 빛을 보아서는 안 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빛을 보아서도 안 될뿐더러,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 나설 자격이 없다.

 

그리하여 신들 앞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민족들은 서로 훌륭하게 질서를 잡아가면서,

 

튼튼하고 고귀하게 아름다운 신전(神殿)들과 도시들을

 

세워서 해안 위로 우뚝 치솟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름난 도시들, 축제의 화관들은 지금 어디서 꽃피고 있는가?

 

테베(Thebes)도 아테네(Athens)도 시들고,

 

올림포스(Olympus)엔 무기들 부딪치는 소리도

 

경기하는 황금마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코린토(Corinth)의 배들도 왜 이제는 꽃 장식을 하지 않는가?

 

왜 성스럽던 옛 극장들마저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왜 이제는 더 이상 주신(酒神)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춤추지 않는가?

 

왜 신은 인간의 이마에다 옛날처럼 표시를 하지 않는가?

 

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옛날처럼 성인(聖印)을 찍지 않는가?

 

아니면 그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몸소 와서

 

위로하며 천상의 축제를 마무리 지어 끝내버리고 만 것인가?

 

 

 

7.

 

 

 

그러나 친구여! 우리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

 

신들이 살아 있어도 우리의 머리 위 저쪽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끊임없이 역사(役事)하지만

 

우리가 살아 있든 죽었든 관심도 없다.

 

신들은 우리를 무척 아끼기는 하지만,

 

깨어진 우리의 그릇으로는 신들을 담아낼 수도 없을뿐더러

 

신들이 가끔씩밖에 채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건 신들이 채워주기를 꿈꾸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당혹함도 잠처럼 도움이 되는데,

 

고통과 밤이 우리를 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웅들은 청동의 요람에서 튼튼하게 자라나고

 

심장들은 지난날 천상의 신처럼 강한 힘을 얻게 된다.

 

그들은 뒤에 천둥소리를 내면서 내려오겠지만

 

그 동안 동료들도 없이 혼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잠이나 자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없는 시대의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하지만 그대는 시인들을 성스러운 밤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원정을 간 주신(酒神)의 성스러운 사제들 같다고 말한다.

 

(* 술을 예찬하고 있다. ‘spirits’을 뜻하기도 한다.

 

괴로울 때 술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인간을 말하고 있다)

 

 

 

8.

 

 

 

그러니까, 얼마 전에, 우리들 생각으로는 오래 전에,

 

우리 생에 기쁨을 주던 신들이 모두 하늘나라로 올라갔을 때,

 

아버지께서도 인간들에게서 얼굴을 돌려버리시어,

 

그 길로 이 지상에 슬픔이 시작되었을 때,

 

마침내 한 조용한 수호신께서 나타나시어,

 

하늘의 신처럼 위로하며 낮의 세계에 종말을 알리고 사라져가셨을 때,

 

언젠가 이 지상에 왔었으며 또 다시 오리라는 표시로

 

천상의 합창대는 선물 몇 가지를 남겨두고 떠났으니,

 

우리는 그 선물을 옛날처럼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신을 통해 얻는 기쁨보다 쾌락을 더 큰 것으로 여기고 있고

 

아직까지 최상의 기쁨을 누릴만한 자들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감사할 것이 있다.

 

지상의 열매로 천상의 빛의 축복을 받은 빵과

 

천둥의 신으로부터 받은 포도주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신들을 생각한다.

 

한때 지상에 왔었고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신들을 생각할 뿐이다.

 

그 때문에 시인(詩人)들도 진심으로 주신(酒神)을 찬양하고 있으니,

 

주신(酒神)에게는 찬양의 노래가 공허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9.

 

 

 

그렇다! 시인들은 주신(酒神)이 낮과 밤을 화해시키며(* 밤낮을 잊게 만들고)

 

영원히 하늘의 별들을 높은 곳이나 낮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노래한다.

 

주신(酒神)이 사랑하는 늘 푸른 가문비나무의 잎사귀처럼,

 

가려 뽑아 만든 담장이 화환처럼,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주신(酒神)이 끝까지 남아,

 

신을 잃어 어둠에 휩싸인 인간들에게

 

사라져버린 신들의 흔적까지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노래로 예언했던 존재,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서양의 후손인 우리들이다!

 

(* 사도 17,28 참조)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이를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도,

 

어느 것에도 역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심장이 없는 그림자인 까닭이다.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알아보시고 받아들이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심장이 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

 

그 시리아 사람이 횃불잡이가 되어 그들의 세계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면 거룩한 현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던 영혼들이 활짝 웃고,

 

닫혔던 눈들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인들인 타이탄족들(Titans)

 

대지(大地)의 팔에 안겨 꿈에 취해 쿨쿨 잠자고

 

(*디오니소스는 타이탄들에게 찢겨 죽습니다)

 

시기심 많은 지옥의 개 케르베로스(Cerberus)까지도

 

술에 취해 잠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우리들이 어릴 때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죽는 꼴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꼭 같은 말씀을 누차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알아 듣지 못하자

 

부활하시어 여태까지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성령을 입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시는 꼴과 부활하신 사실을 아는

 

우리들은 옳은 신자가 되어 있는가요?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그릇된 에고가 꽉 차 있으므로

 

주님을 모실 공간이 전혀 없어, 믿는다고 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진리를 받아 들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장 큰 오류는 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만

 

이기심 때문에 이웃은 없고 나 자신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마음이 아픕니다.

 

위로는 해주지만 낫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통을 참지 못하여

 

상대방에게 짜증을 부리고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대방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할 뿐입니다.

 

 

 

자아란 무엇인가요? 우리들이 첫 세례를 받을 때

 

“마귀를 끊습니까?”하는 질문을 받는데

 

마귀가 바로 그릇된 에고를 갖고 있는죄인인 우리들인 것 같습니다.

이른바 마귀에 씌어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귀를 부정하면 성난 멧돼지처럼 날뛰며 완강한 저항을 합니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지만

 

‘완전한 사람이란전혀 하자가 없는 완벽한사람이 아니라

 

‘그릇된 자아를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하고 의로운사람입니다.

 

뿌리 깊게 심어져 있는 에고를 버리지 않는 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횔덜린은 옳은 종교를 갖지 못하여

 

구원 받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은 각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초대교회에서 내 것 네 것 없이 서로 나누며 살았고,

 

그 전의 그리스 시대에는 누구나

 

인간이 되려고노력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시도록 하셨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리스 로마 시대처럼

 

제신(諸神)을 믿고 우상을 숭배했던 과거에

 

사람들이 더 순박했음을 말하고

 

술에 취하여 마귀들이 득시글거리는 속세를 술에 취하여 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어 결국 실패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을 때마다 기념하라고 하셨지만

전혀 구원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간을 비웃고 있습니다.

 

 

 

구원(救援)’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늘나라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짐승 같은 사람이나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되지 않고

 

성령(聖靈)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식품입니다.

 

그 중 하나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흥의 목적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차용해온

 

이 시의 제목의 이미지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시의 원제가 <주신(酒神)>이었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됩니다.

 

‘빵’은 지상의 양식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외 아드님, 예수를 뜻하지만,

 

‘포도주’는 예수의 피와 관련되기보다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us, * ‘두 번 태어난 자를 뜻함)를 상징합니다.

 

이 시에서는 디오니소스를가문비 나무담장이 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지팡이 끝에는 가문비 나무의 솔방울이 달려 있고,

 

디오니소스뿐만 아니라 그의 축제에 참가하는 자들은

 

모두 담장이 나무로 만든 화환을 둘렀습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로써 경직되어 있는

 

현재의 몽매한 인간들의 정신을 일깨웁니다.

 

포도주는 사람들의 잠들어 있는 열정을,

 

그리하여 천상의 신들에 대한기억을 일깨우는 매체입니다.

 

비가의 끝 부분에 가서포도주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레스를 잠재우는 역할을 합니다.

 

지하세계의 악마적인 힘도 디오니소스에 의해 잠재워지는 것입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를 통해밤과 낮사이의화해를 꾀합니다.

 

즉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포도주는 늘 푸른 상록수처럼 늘 즐거운 존재입니다.

 

신을 잃은 자들에게 위안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을 상기시키기 위해 나누어주신 것이듯

 

여기서는 디오니소스의 재림을 무지한 민중에게 기억시키기 위한선물입니다.

비가 전편에 걸쳐서포도주는 그러므로 신들이 재림할 때까지

 

고통에 겨워하는 시인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인의 입장에서포도주는 시()를 말합니다.

 

 

 

이 시는 총 9개 연이 3개 부분으로 나뉘어진 3단 논법적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내용도 이에 따라 3단계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계시를 전하는 이 시는

 

의 대비적인 두 개의 기본 은유를 축으로 하여 전개됩니다.

 

밤과 낮 사이에는 현재로서는 커다란 틈이 존재합니다.

 

 

 

1연은 밤이 시작되는 모습을 자연의 순리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거미지는 가을 저녁을 묘사하던 시인은

 

밤을놀라운 밤’, ‘낯선 여인이라 부르며 이에 대한 경외감을 표합니다.

 

2연에 접어들면서 시인은밤의 은총이라는 말까지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밤이 어찌해서 은총이 될까요?

 

밤 그 자체가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밤은 우리로 하여금 신성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에 따라 밤은 현상적인 위치를 떠나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여 받습니다.

 

이렇게 은유로 변용된 밤은 깨어 있는 시인을 위한 밤이며,

 

그 속에서 시인은 신성의 은총을 받아 잠들어 있는

 

뭇 백성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습니다.

 

신성을 일깨우는 노래를, 횔덜린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시대, 아니 있어도

 

우리의 머리 위 닿지 않는 곳에 계시는 시대로 규정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시대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시대

 

단순히 신의 위력이 약해졌다는 뜻을 넘어서

 

우리 인간들의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시대를 뜻합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물결 속에서 아직도

 

후진 봉건 영주체제 하에 시달리던 독일의 정치적 상황을 빗대서 한 말입니다.

 

 

 

횔덜린이 이에 대안으로 내세우는 곳은 바로 그리스 문화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이 시의 제4연에서 6연까지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횔덜린은 그리스의 세계에서 하나의 이상향을 보았습니다.

 

옛 그리스인들은 자연 속에 작용하는 신의 존재를 믿고, 또 그들을 숭상했습니다.

횔덜린은 신들 앞에서 나름대로의 인간으로서의 몫을 다해보려 했던

그리스 사람들의 태도가 문화의 부흥과 행복한 생활을 가능케 해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그리스의 세계를 동경하는 그 기본 동기는

 

그 세계가 지녔던 인간 공동체적 삶 때문입니다.(4)

 

이러한 하나된 마음가짐이 신들을 인간의 세계로

 

다시 모셔 올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에서 여덟 번에 걸쳐 쓰인어디에라는 의문부사는

 

과거를 찾는 시인의 비감과 초조함을 애절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현재를 밤의 세계로,

 

그리스를 광명이 내리쬐던 빛의 세계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쓰여진 밤과 낮의 은유는 극적인 반전(反轉)일뿐만 아니라

 

거기에 숨어 있는 이중적 의미에 그 특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밤은 우선 부정적인 세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신들이 사라진 어두운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밤이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에는 시인이 신과의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밤은 낮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밤은 또한 결핍과 궁핍의 시간으로

 

이것이 오히려 시인을 시인답게 만들어줍니다.

 

밤은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존재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횔덜린은 낭만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의 밤은 다른 사람들이 다 잠들어도 그만은 깨어 있는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어려운 직업입니다.

 

시인은 또 불 같은 신의 말을 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 즉 디오니소스는횃불을 들고 이 땅에 재림합니다.

 

그리하여 어둡던 밤의 세계가 대낮으로 환해집니다.(7,8,9 )

 

시인은 여타 사람들과는 구별됩니다.

 

횔덜린은 이것들을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차원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로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 인간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각성해야 합니다.

 

시인은 이때 대속적(代贖的)인 존재로서 백성을 위해 깨어 있게 됩니다.

 

그가 할 일은 잃어버린 신과 일방 백성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그는 반신적(半神的)인 존재가 됩니다.

 

그의 사명은 신의 목소리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이를 민중에게 예언해주는 것입니다.

 

 

 

정신의 방랑자인 시인이 찾아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었던 시절에 대한 성스러운기억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근원을 찾아가는 방랑자가 됩니다.

 

시인은 일반 백성에게 방랑에서 찾은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전달자입니다.

 

시인은 횔덜린에게 있어서 신에 의해이마에 표식을 부여 받은 자

 

즉 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끝까지 완수해야 합니다.

 

예술을 통한 민중에 대한 의식개혁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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