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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이름 없는 작은 꽃이라도)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01 조회수1,849 추천수0 반대(0) 신고

 

"이름 없는 작은 꽃이라도"

+ 찬미 예수님

 아주 드물게, 농담반 진담반

저한테 묻는 분들이 있어요.

“신부님은 살면서 누군가를

짝사랑해본적은 없으시죠?”

늘 자신만만하셔서

제가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대요.

뒤돌아보면 짝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중3때,

연상인 고3 신발가게 집

딸을 좋아했죠.

괜히 좋았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신발가게

한 번 더 가려고 멀쩡한

운동화를 문지르다가

엄마한테 걸려 뒤지게 맞고

멀쩡한 운동화 끈을 칼로

잘라서 끈 사러가는 핑계를 대고

가게에 가서 말도 못하고.

저는 어릴 때 별명이

똑똑해서 변호사였어요.

하지만 짝사랑하면 사람이

바보가 되나 봐요.

 두 번째는 신학교 들어가서

한 여인이 있었어요.

이 여인은 오직 사진만

볼 수 있는 여인이에요.

 사진을 보면 가슴이

그냥 두근두근 뛰었어요.

누구인가 하면

소화데레사 성녀!

 오늘 그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이에요

 우리 교회 전례를 보면

일과 축일이 겹치면

보통 축일이 밀려요.

그런데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라는 말이

쑥 들어가고 소화데레사

성녀 대축일 미사를 지냅니다.

이만큼 이 성녀가 우리

가톨릭의 큰 성녀입니다.

성녀는 1873년에 태어나서

1897년 9월 30일에 돌아가셨어요.

그때가 만 24세, 우리나이로 25살,

그리고 1925년에 시성이 되셨어요.

 소화 데레사 성녀에 내가

신학생 때 빠져서 맨날 그 성녀

상본만 구해가지고 모시고

성녀에 관련된 책들

정말 많이 읽었어요.

그런데 이 소화데레사 성녀가

나오기까지의 그 과정은

대단히 드라마틱해요

 성녀의 아버지는 루미 마르탱이고

엄마는 젤리게렝이라는 분입니다

이 두 분은 처녀총각 때

산 두 개 정도 떨어져 살았고

아버지 루이 마르탱은 꿈은

 신부였고 신학교도 들어갔지만

공부를 너무 못해서 쫓겨났어요.

엄마 젤리게렝은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몸이 너무 약해서

따라갈 수 없었어요.

몇 년 동안 수녀원에서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고

나가라 하니 수녀원 앞에서

일주일을 버텼어요.

그래도 뭐 한번

닫힌 문을 열 수 있나?

이렇게 신학교 갔다가

쫓겨난 사람과 수녀원 갔다

쫓겨난 여자는 중매로

결혼을 합니다.

9남매를 낳았는데 그 중에서

소화데레사가 제일 막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은

묘하지요?

그 아버지가 신부로 살았다면,

그 엄마가 수녀로 살았다면 이렇게

위대한 성녀가 나올 수 있었을까?

쫓겨날 때는 얼마나

하느님을 원망 했겠습니까?

머리 나쁜 것, 몸이 아픈 것을

원망했겠습니까?

하느님의 지혜는

어리석은 어둠으로

어떻게 헤아릴 길이 없어요.

우리는 한치 앞도 못 보지만

하느님은 집안 전체를 보고

그리고 인류 역사를 보고

 가톨릭의 역사를 봄으로써

렇게 큰 성녀를 이 두 사람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이죠.

 소화 데레사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고 해요.

언니 3명이 간 가르멜 수도원에

하루라도 빨리 가서 수도생활을

하고팠는데 나이가 안차요.

그래서 13살에 꼬맹이가

프랑스에서 이태리로 가서

교황님을 만나죠.

그때 교황이 레오13세죠.

그분을 만나서 수녀원

입교시켜 달라고

쫓아다닙니다.

교황님도 교회에 큰일을

 할 아이라고 하고 판단하고,

15살 입회를 특별허락 하십니다.

 당신이 수녀가 못 된 것이 늘

하느님께 미안했던 어머니는

자식 중 봉쇄수녀원에만

넷을 넣었어요. 대단한 거죠

 가르멜 수녀원에 간 데레사 수녀는

무척 행복했지만 몸이 참 약했어요.

체력도 딸리고 항상 골골했죠.

하지만 소화 데레사 성녀는

거기 있는 수도자들 가운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수도자였습니다.

 수녀원 안에 빨래터가 있었는데

방망이질을 너무 세게 하시는

터프한 수녀님이 계셨어요.

얼마나 방망이질을 좌우로

해대는지 구정물이 튀어서

 옆자리에서는 아무도 안가요.

그런데 한 수녀만 늘

그 옆에 가서 앉아요.

 누구였을까요? 소화 데레사죠.

왜 앉았을까요?

구정물을 맞으러!

‘예수님이 침 뱉음을 당할 때

그 모욕을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느끼게 해주십시오.’

다른 수녀들은 하얀 수도복에

구정물 튀는 것이 싫었는데

어린 소화 데레사

성녀만 옆에 가요.

또 어떤 이유로?

얼마나 외로울까?

저렇게 빨래를 두드리는데

 아무도 없이 다 도망가니

나라도 옆에 있어야지.

 하여간 남이 보기에 다른

수도자들이 하기 싫은 걸

일부러 하는 걸로 유명했대요.

다른 수녀들이

인상 쓰며 더러운 것

치울 때는 항상 성녀가 가서

방글방글 웃으면서 치웠대요.

 나중에 병이 깊어 져서 혼자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고

수도복을 입을 수도 없게 되었죠.

하지만 봉쇄 수도자들은

자기 방에 혼자 누워있어도

기본적인 수도복은 입어야 해요.

그래서 다른 수녀님이 아침에

소화 데레사 수녀한테 와서

매일같이 옷을 입혀줬대요.

요새야 간편해졌지만 예전에는

옷이 복잡하고 핀으로

꼽는 것이 많았어요.

그런데 한번은 옷을 입히다

살이랑 같이 뚫었어요.

입혀준 수녀님도 몰랐죠.

저녁이 되어 옷을 벗겨주려고

가니까 세상에 피가

뻘겋게 묻어나오더래요.

“내가 살을 뚫었네 수녀님

종을 치지요,

 내가 달려왔을 텐데.”

하니 데레사 수녀가 그랬대요.

“수녀님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못 박힐 때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아프셨을까 생각만 했는데,

오늘 제가 그 고통의

 천분의 일이라도

느낀 날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은 병상에서

 영적 일기를 쓰셨고,

나중에 돌아가실 때

그 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지요.

사실 그 덕분에 시성까지

되면서 포교사업의 주보성인,

전교하는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이 되셨어요.

아마 이 세상에 있는 성

인 성녀 가운데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성녀가 아닐까 해요

15살에 입소하여 10년도

수도자로 못살았는데 위대한

성녀가 될 수 있었어요

 데레사 성녀는 다른 것은

다 양보하였지만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

딱하나 있었어요.

무얼까요? 궁금하죠?

괴로움만큼은 양보를 안했데요

자기한테 찾아온 십자가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사랑까지 했대요.

 우리들은 십자가 있을

때마다 그냥 엄청 괴롭죠.

정말 사랑한대도

어찌 쉽겠습니까?

그 십자가는 사람 때문일 때도,

 돈일 때도, 약한 몸뚱이일 때도,

자식일 때도,

무능한 내 자신일 때도 있지만,

우리들은 내 십자가 때문에

무릎이 꺾이고 십자가 무게를

못 이겨 자빠지고 깨지고

피가 철철 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소화 데레사 성녀는

버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기까지 했데요

왜냐하면 그 어린나이에

수녀님은 아신거예요.

고통이 십자가가 예수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알았던 것이죠

고통을 사랑하면 우리는 저절로

겸손해진다는 것을 깨달으신 거죠.

그래서 데레사 성녀 앞에는

항상‘소화(小花)’가 붙어요.

프랑스 말로 엉펀

(enfant,어린아이),

다른 말로 작은 꽃,

숨은 꽃이라고 해요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즐거움 속에서 하나의

작은 꽃으로 살기를 원했죠.

 우리 보통 세상에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좋아해요

꽃도 눈에 띄고 화려하고

향기가 펑펑 나는

그런 꽃을 좋아해요

세상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지만 이름 없는 작은

꽃이라도 하느님께서는

똑같이 생명을 주셨고,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라도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는 거죠.

사람들의 칭찬한번,

눈길한번 받은 적 없는 꽃이라도

 불평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증거한다는 거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소화,

 작은 꽃이라고 하면서

복음의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우리 한국과 소화 데레사 성녀는

인연이 있습니다.

내가 예전에 감곡 성모님

순례지에 있었는데 그 감곡성당이

어느 신부님이 세운 줄 아세요?

프랑스 남 보르도 주 출신

임 가르밀로 신부님이에요.

조선으로 선교사로 발령을 받고

배를 타기 전에 리지외 가르멜

수도원을 찾아가

기도를 부탁했어요.

임신부님이 기도를 부탁하러

가르멜 수녀원에 갔던 바로

그 자리에 데레사

성녀가 앉아있었어요.

임 가밀로 신부님은

소화 데레사 성녀보다

4살이 많아요

소화 데레사 성녀는 미사 후

따로 신부님과 면담을 요청해서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신부님이 가시는

조선 땅은 제가 늘 기도 속에

기억하겠다고 했답니다.

이렇게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기도를 받고 임 가밀로 신부는

조선에 와서 지은 성당이

감곡 성당이에요

 감곡 성당은 제단이 많아요.

여기 제단이 2개죠?

1965년 전에는 신부님이

뒤를 보고 미사를 드려

감실 밑에 제단이 또 있어요.

그런데 감곡엔 이것만도 아니고

양 옆에 더 있는데,

소화 데레사 제단이 있어요.

그리고 그 제단 위에

성녀의 동상과 상본,

그 밑에 임 가밀로 신부님이

기도하는 사진이 있어요.

 또, 감곡 성당에는

종이 3개 있어요.

여긴 하나죠?

마리아 종,

 소화 데레사 성녀종,

벨라뎃다 종.

 가밀로 신부님은 70 즈음에

기도를 해주시겠다던

수녀님이 성녀가 되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성녀 얼굴을

그려서 만든 소화 데레사 종을

프랑스에서 가져옵니다.

 이렇게 우리 땅은 소화 데레사

성녀와 깊은 관계가 있고

그 중간에는

임가밀로 신부님이 계시죠.

임가밀로 신부님이 계신

조선땅을 위해 기도하신

데레사 성녀를 한국 신자들이

더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일 겁니다.

 그러면 소화 데레사 성녀의

가장 큰 덕은 무엇이냐?

성녀는 다른 성인성녀처럼

엄청난 기적이 많이 일어나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느냐?

늘 일상 생활 가운데

작은 고통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하며 늘

기쁘게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기쁘게 살아가며

늘 작은 꽃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자, 이 분이 성녀가 되셨다면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어요.

일상생활 가운데 하루에도

수 십번씩 찾아오는

영적 순교의 순간 그 십자가를

지어야하는 순간,

그때마다 성녀 데레사를

생각하면서 그분께

전구를 청하세요.

“주님 저 작은 꽃은 주님의

작은 도구로 쓰여지길 원합니다.

저를 쓰셔서 이 성당에

은혜가 내려지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소화 데레사

 성녀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께 감사 그리고 그 아버지를

신학교에서 쫓아낸 신부님과

어머니를 수녀원에서 쫓아낸

수녀님께 감사합시다. 아멘

2017년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대축일(10/01)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서운동성당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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