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04일 (토) 가해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Memorial of Saint Charles Borromeo, Bishop
Saturday of the Thirtieth Week in Ordinary Time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로마서 11,1-2.11-12.25-29 / 필리피서 1,18-26
루카복음 14,1.7-11
제 1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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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독서 (홀수
해)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1,1-2.11-12.25-29
형제 여러분, 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
2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25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26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자가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함을 치우시리라. 27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어
줄 나의 계약이다.” 28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eading 1
Rom 11:1-2a, 11-12, 25-29
Brothers and sisters:
I ask, then, has God rejected his people?
Of course not!
For I too am a child of Israel, a descendant of
Abraham, of the tribe of Benjamin.
God has not rejected his people whom he
foreknew.
Do you not know what the Scripture says about
Elijah, how he pleads with God against Israel?
Hence I ask, did they stumble so as to fall?
Of course not!
But through their transgression salvation has
come to the Gentiles, so as to make them jealous.
Now if their transgression is enrichment for the
world, and if their diminished number is enrichment for the Gentiles, how much
more their full number.
I do not want you to be unaware of this mystery,
brothers and sisters, so that you will not become wise in your own estimation: a
hardening has come upon Israel in part, until the full number of the Gentiles
comes in, and thus all Israel will be saved, as it is written:
The deliverer will come out of Zion, he will
turn away godlessness from Jacob; and this is my covenant with them when I take
away their sins.
In respect to the Gospel, they are enemies on
your account; but in respect to election, they are beloved because of the
patriarch.
For the gifts and the call of God are
irrevoc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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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1,18-26
형제 여러분, 18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5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26 그리하여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가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나 때문에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Reading 1
PHIL 1:18B-26
Brothers and sisters:
As long as in every way, whether in pretense or
in truth, Christ is being proclaimed, and in that I rejoice.
Indeed I shall continue to rejoice, for I know
that this will result in deliverance for me through your prayers and support
from the Spirit of Jesus Christ.
My eager expectation and hope is that I shall
not be put to shame in any way, but that with all boldness, now as always, Christ
will be magnifi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For to me life is Christ, and death is gain.
If I go on living in the flesh, that means
fruitful labor for me.
And I do not know which I shall choose.
I am caught between the two.
I long to depart this life and be with Christ, for
that is far better.
Yet that I remain in the flesh is more necessary
for your benefit.
And this I know with confidence, that I shall
remain and continue in the service of all of you for you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 so that your boasting in Christ Jesus may abound on account of me when
I come to you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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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Gospel
Lk 14:1, 7-11
On a sabbath Jesus went to dine at the home of
one of the leading Pharisees, and the people there were observing him
carefully.
He told a parable to those who had been invited,
noticing how they were choosing the places of honor at the table.
"When you are invited by someone to a
wedding banquet, do not recline at table in the place of honor.
A more distinguished guest than you may have
been invited by him, and the host who invited both of you may approach you and
say, 'Give your place to this man,'
and then you would proceed with embarrassment to
take the lowest place.
Rather, when you are invited, go and take
the lowest place so that when the host comes to you he may say, 'My friend, move
up to a higher position.'
Then you will enjoy the esteem of your
companions at the table.
For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but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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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년 11월
04일 신부님)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보다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권고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겸손해야만 합니다. 교만한 지식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 8,1-2)
겸손이야말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적지 않은 경우 윗자리를 선호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만한 자세로 산다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계실 공간이 없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겸손하려면 먼저 자신을 잘 알고, 남을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지요.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대하는 이를 만나더라도, 이마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가 나에게 서운하게 대한다면, 나
역시 그에게 무언가 서운하게 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되돌아보는 것이지요. 또한, 상대방의 언행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마저 깨닫습니다. 따라서 겸손한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이웃을 통해 전해 주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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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년 10월 29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확신에 찬 고백은 들을수록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후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기쁨 때문에 그리스도께 완전히 몰입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본디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 철학, 역사, 문학, 언어 등에
능통하였고, 예루살렘에서 당대 유명한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생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바리사이였습니다. 그가 율법을 업신여기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간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바오로의 인생 역전은 유다 사회에서 최고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평생을 찾은 하느님의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 속에 있음을 깨닫고,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이가 되는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겸손은 사람들의 대우를 기대하며 짐짓 낮은 자리로 가는 위선과는 다릅니다. 괜히 돋보이거나
나댄다는 손가락질이 싫어서 체면치레를 하거나, 속마음을 숨기고 말로만 미천한 척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참된 겸손은 삶 그 자체가 낮은 삶입니다. 어떠한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진정 겸손한 사람은 내 주변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겸손한 사람보다는 내게
이득이 되는 사람들 곁에 내가 더 자주 머물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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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년 10월 31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바오로에게, 자기 동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현실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로마 9,2)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가는 곳마다 언제나 가장 먼저 유다인들의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발길을 돌려 이방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여 이방인들이 유다인들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현실을 일깨워 준 다음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하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과 신비를 찬미하며 마무리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결국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경이로운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이스라엘이 의로움을 추구하면서도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로마 10,3) 하였기에 결국 자기
행위의 의로움에 이르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기의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먼저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의 이러한 신비로운 계획 덕분에 하느님을 알게 된 우리가, 마치 우리
자신이 믿음이 더 깊고 지혜로워서 이스라엘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우쭐거린다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그 자리에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초대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 무엇보다도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게 해 주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를 선택하라는 가르침을 통하여 겸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야말로 겸손의 결정적인 표현이고,
그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겸손의 극치입니다.
겸손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미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며, 그러한 사람에게 기꺼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시편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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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년 11월 01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모든 성인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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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년 11월 0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위령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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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년 11월 03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중국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오만(傲慢)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병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아들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효하고, 신하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충이 된다. 아버지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자비롭지 못하고, 벗으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신(不信)이 된다. 따라서 오만에는 단 한 가지도 좋은 면이 없고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탐내고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공명심과 오만함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누가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을 들어 높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하며
예수님의 겸손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앉을 자리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맨 끝자리입니다. 끝자리에 앉으면 아무도 우리를 시샘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자리에 앉아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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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년 10월 29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사막의 은수자에게 어느 제자가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마귀도 열심히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은수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합니다. “암, 열심히 기도할 수 있지.” 다시 제자가 묻습니다. “마귀도 열심히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은수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합니다. “마귀도 좋은 일을 하고 멋진 설교도 할 수 있지.” 그러자 제자가 묻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는 모든 능력을 갖고 있지만 단 한 가지, ‘겸손’은 가지고
있지 않다네.”
마귀를 타락한 천사라고도 하지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천사가 타락한 것은 겸손의 반대말인
교만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타락도 결국은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더
이상 하느님께 속하지 않으며 스스로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뿌리는
하느님께 속하기를 거부하는 교만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와 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한다고 해도, 겸손하지 못하면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고 자기만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관심을 받으려고 자신이 가진 것과 아는 것으로 온갖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졌더라도 ‘겸손함’을 가지지 못했으면, 세상살이에서 첫째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꼴찌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가진 것은 그 사람 것으로 끝나지만,
겸손한 사람이 가진 것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기에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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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년 10월
30일)
유가 경전의 하나인 『주역』(周易)에는
육십사괘(六十四卦)가 있습니다. 괘는 각각이 모두 그에 걸맞는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형상을
풀이하여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괘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겸괘’(謙卦)입니다. 겸괘는 지중유산(地中有山)이라는 형상, 곧
땅속에 산을 가지고 있다는 형상인데, 이는 겸손한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겸손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림들
가운데 어떤 이는 벽에 ‘겸괘’를 그려 놓고 한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삶입니다. 낮춘다는 것은 곧 자신을 죽이거나 포기하며,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태도이지요. 그러면 다툴 일도, 욕심낼 일도 없겠지요? 욕심으로 가득 차면 오만해지고, 오만해지면 자신을 덜어 내거나 비워 낼 줄을 몰라서 결국 스스로 망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겸손한 삶을 살 것을
주문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의 세력에 내어 주시면서 몸소 겸손의 극치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겸손이 모든 사람을 죽음의 세력에서 살려 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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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년 10월 31일)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모르는 사이라도 예의를 갖추면 공손한 관계가 됩니다. 싫은 사람이라도
무시하면 언젠가 무시당합니다. 숨 쉬는 모든 존재는 멸시하면 ‘반응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 찾아오고, 미워하면 미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격인 사람의 초대를 받으십니다. 그는
영향력이 있었나 봅니다. 많은 바리사이들이 모였는데, 모두들
상좌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그들의 모습에 주님께서는 일침을 가하십니다. “누가 너를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아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살다 보면 ‘평범한 자리’로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어정쩡하게 버티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평범한 자리로 돌아오면
많은 것이 해결되고 홀가분해질 터인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미련 때문입니다. 중요한 자리일수록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착각을 떨치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훈련을 하라고 하십니다. 평소의 겸손한 처신이 자리의 유혹을 막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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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년 10월
31일)
모든 성인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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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년 11월 02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고난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친구 사이라도 특별 대우를 받으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식당이나
상점도 더 나은 친절로 대해 주면 그곳을 자주 찾게 됩니다. 그만큼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는 호감을
갖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십니다. 그런데 자리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인 까닭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데 어찌 저 자리에 앉아 있는가?’ 아마도 이러한 표정이 오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살다 보면 낮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어정쩡하게 버티고 있는 이들을 숱하게 봅니다. 내려오면 많은 것이 해결되고 홀가분해질 텐데도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리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편한 자리일수록 더 머물고 싶어집니다. 높은 자리일수록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려오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겁니다. 겸손만이 높은 자리의 유혹을 막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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