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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깨어있기 위해 호흡하라
작성자김리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11 조회수3,443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년 가해 연중 제32주일


<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복음: 마태오 25,1-13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1661)

 

 

어떤 권투 영화에서 흠신 두들겨 맞고 숨을 헐떡이며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기 위해 의자에 앉아있는 권투선수에게 코치가 선수의 반바지 벨트를 잡아당겨 배를 편안하게 해주며 숨 쉬어... 숨 쉬어... 숨 쉬어...”라고 하는 장면을 인상 깊게 본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면 선수는 코치의 숨 쉬라고 벨트를 끌어 잡아당겨주는 박자에 맞춰 호흡을 늦춥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 소리도 안 들렸었는데 조금씩 관중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들리고 응원하는 딸의 목소리도 들리고 코치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나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상대를 흠신 두들겨 패 주어 K.O. 시켜 버립니다. 마치도 그 이전에는 어떤 힘에 의해 손발이 묶여 있다 지금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4시간만 일한다라는 책 제목이 있습니다. 하루에 4시간 일한다는 말이 아니라 일주일에 4시간 일한다는 말입니다. 일주일에 4시간 일하는데도 그 이전에 하루에 15시간 일할 때보다 수입이 좋아졌고 그 이유를 나름 체계를 세워 쓴 책입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을 할 때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자신의 시간을 다 써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통찰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권투 이야기나 지금 이 이야기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깨어나지 못하면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깨어있는 줄 알지만 잠자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잠을 자며 무슨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지만 실상 돌아보면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사로잡혀 그를 위해 노예생활만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손발을 꽁꽁 묶었겠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는 통로가 호흡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숨을 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 현명한 처녀 다섯은 구원받겠지만 미련한 처녀 다섯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반드시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 열 처녀 모두 잠을 잤다는 데 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현명한 처녀는 기름을 더 가지고 있었고 미련한 처녀는 꼭 필요한 만큼만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현명한 처녀들은 그분을 맞을 준비를 바로 할 수 있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깨어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호흡과 무슨 상관이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흡을 하면 깨어있는 것이고 호흡을 하지 않으면 잠자는 것입니다. 잠자면서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있어도 잠자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막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무의식이라고도 하는데 보물창고입니다. 이것만 잘 사용하면 무한한 창의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김현아 선수가 공중으로 뛰며 몇 바퀴 돌아야 하는지 무게가 어떻게 이동되는지 생각할 여유는 없습니다. 최고의 능력은 자신의 노력이 최소화 될 때 나올 수 있습니다. 다만 생각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연습을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몸도 주인이 있고 영혼도 주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 한 가운데, 즉 마음 안에 영혼을 만들어주신 하느님께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내가 사라질 때 깨어나십니다. 마치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다 베드로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기를 포기할 때 예수님께서 깨어나셔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몸과 영혼은 서로 의견이 달라 맨날 부딪힙니다. 그러면서도 매순간 대화를 합니다. 몸은 술을 마시고 싶어 하고 영혼은 그만 마시라고 말합니다. 이때 에이, 모르겠다!”라고 하며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마음의 힘이 발동한 것입니다. ‘모르겠다!’라는 말 안에는 대화를 중단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마음 안에 있는 주님께서 깨어나시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몸의 주인을 무의식, 영혼의 주인을 의식, 마음의 주인을 초의식이라 말합니다. 초의식이 발동하려면 무의식과 의식의 대화가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의식까지도 의식이 원하는 것에 협력하게 되어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반대로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 안에 머무르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 대화가 일으키는 감정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몸의 저항이 생기게 만들어 몸과 말과 행동이 경직되게 만듭니다. 반면 초의식의 단계에 오면 모든 행동이 아주 쉽게 되며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잘 되어나가는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걸음을 걷습니다. 그러면 무의식, 혹은 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걸어야 돼?”

그러면 의식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당 가야 돼. 일어나자. 그리고 오른 발을 내딛어. 그리고 왼발. 무게중심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해야 돼. 앞도 보고 발 디디는 곳도 잘 보고 또 다음 행동도 생각해야 돼. ... ”

이런 상태가 되면 사람은 자신 안에 갇히게 됩니다. 넘어질까 두렵고 육체의 욕망에 질까 두렵고 성당에 가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니 자신을 이기고 성당에 가도 얼굴이 편한 표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식적인 행동은 성공해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일에 또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두려움만 더 쌓이기 때문입니다. .

이런 상태가 미련한 처녀들의 상태입니다. 기름을 얻는 과정이 힘든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처녀들은 기름을 얻는 일이 쉽습니다. 어쩌면 기름을 사러가는 과정이 습관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항상 충분한 에너지를 비축해 두고 있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두 발로 걷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습관이 되면 잠이 깨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자신과의 대화가 습관이 된 사람은 다시 정신을 차리는데 그만큼 오래 걸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명한 처녀처럼 다시 깨어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려면 평소에 어떠한 습관을 들여야 할까요?

의식하지 않아도 그런 행동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와야합니다. 미사를 가는 것이 행복해야하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일이 행복해야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고 성령을 채우는 과정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기도를 가장 행복한 단계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옵니다. 그것도 매일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 간신히 출근할 시간까지 이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이들은 이불 속에 있으며 일어나야 돼! ... 아냐, 조금만 더 자자! ... 일어나야 돼, 멍청아! ... 아냐, 아직 시간이 10분 남았잖아 ... ’라며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대화합니다. 이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바로 미련한 처녀의 삶이고 꿈을 꾸는 삶입니다.

 

혹시 이런 자신의 대화 안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이 오면 그냥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십시오. 자신의 호흡을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자신이 호흡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불의 촉감을, 방의 밝기를,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벗어나야 초자아의 세계, 성막으로 말하자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어둡지만 평화로운 곳입니다. 주님의 힘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단계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게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힘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왜 그리 고민하며 누워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뱀과의 대화가 멈추었으니 더 이상 욕망과 두려움이 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몸의 저항이 사라집니다. 저항이 없으니 말도 잘 나오고 글도 잘 써지고 운동도 잘 되고 인간관계는 물론 모든 일이 잘 됩니다. 자신 안에 이런 능력이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이런 승리가 반복되다보면 그 이후부터는 훨씬 쉽게 깨어날 수 있는 습관이 길러지게 됩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말해보겠습니다. 인간관계가 잘 안 되는 이유는 상대를 앞에 두고 자기 생각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마음이 잘 보이려는 욕망입니다. 애정을 갈구하는 마치 애완견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행복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에게 무언가를 계속 요구하며 괴롭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와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와가 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뱀과의 대화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잠깐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걷는 소리를 듣습니다(창세 3,10 참조). 자신과의 대화에 빠져있다 보면 감각을 잃고 감각기능이 떨어집니다. 이때 가장 좋은 것은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학생이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길 때는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다시 귀를 기울이면 선생님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음식이 맛이 없는 이유는 딴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즐길 수 없고 아무 일도 이루어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일은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내 자신을 맡겨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과의 대화를 멈추어야하는데 그 가장 좋은 방법이 호흡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하면 무의식의 작용이 멈춥니다. 왜냐하면 호흡은 가장 무의식적인 행위인데 이제 의식의 범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의식도 작용을 멈춥니다. 의식은 자아와 대화를 해야 커지는데 호흡을 하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아와의 대화가 끊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호흡에 집중하다보면 주님께서 깨어나십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호흡을 하면서 마음 안에 계신 주님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호흡이 주님을 향하는 통로가 되지만 그냥 통로에 머물러만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 빛을 돋보기로 모아야 불이 붙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성경은 여기까지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 맞춰야 되는 초점이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하면 순간 무의식과 의식을 뛰어넘게 됩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은 두려움과 불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가 호흡과 하나가 되면 초의식으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마음으로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도 아주 잠깐 호흡에 집중하며 이 화살기도를 바치면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고 나는 편안하게 됩니다. 내가 편안하니 상대도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 앞에서 편안해야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내가 불편하면 상대도 불편합니다. 내가 편해지려면 나의 에너지가 최소한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마치 두 발로 걷는 것처럼 편안하면서도 즐겁습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내 자신에게서 나와 주님께 나를 맡겨드리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이런 노력이 습관이 되면 언제든 주님께서 원하실 때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잠을 자는, 즉 자아와의 대화에 속박되어 왔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의 습관을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 호흡을 하며 생각을 끊는 연습을 하면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차츰 그 속박으로부터 풀려나오는 기쁨을 느끼면 자주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 일상에서도 쉽게 기도할 때의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원할 때 언제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명한 처녀가 되는 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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