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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11 【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5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14 조회수1,292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늘땅나 11] 【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5

자신의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 나아가려고 하는 이 길은 끝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죽은 모든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분을 따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겪으신 후 부활하신 그분께서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가 24,26)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도 이 길로 들어선다면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되고 마침내는 영광스러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님과 똑같은 영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님과 같은 영광을 차지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에 살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의 육신은 땅에서 취한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고, 영혼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입김”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신 안에 “없어져 버릴 땅”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는 “없어져 버릴 땅”만을 감지하며 살고 있기에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인 양 생각하여 그것들을 얻으려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온 힘을 기우려 그것들로 자신 안에 있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얻고자 한 이들은 그것들을 다 얻은 후에도 ‘채워지지 않는 그 어떤 감정’을 느끼며,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손안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되어 허망함을 금치 못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보다 ‘없어져 버릴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바치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나의 몸”이나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없어져 버릴 것들입니다. 그러나 “나의 몸” “새 하늘과 새 땅”(요한 묵시록 21, 1)에서 “신랑”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마태오 18, 4)이 되기 위하여 빛 자체(요한 1, 9 참조)이시며 참사람으로써 첫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서 “신랑”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더러움을 없애고 사랑을 실천하여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랑의 도구”입니다. 우리에게 육신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다한 후에 사랑을 얼마나 많이 실천했는가에 따라서만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25장 최후의 심판).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살과 피를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 13)고 말씀하시며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올곧게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역사 안에서 실제로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 모두의 먹이”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입니다. 짐승은 없어질 땅에 속하여 목숨이 다하면 죽게 되어 있지만, 사람은 영원한 하늘에 속하여 있기에 결코 죽을 수가 없습니다. 산목숨이, 아니 영원히 살아야 할 목숨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자기 스스로를 짐승과 동등한 위치에 두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실천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짐승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만 행동하기에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행위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본래의 자신의 모습인 참 사람으로 되돌려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분과 같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려면 다른 이에게 내어 주어야 할 ‘자신의 몸을 먼저 깨끗이 할 필요’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바로 이웃의 음식이기 때문’이며 이웃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준 그만큼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님과 같이 깨끗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더럽거나 상했거나 다른 나쁜 물질이 섞여 있는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아무리 자기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주려 해도 먼저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이웃에게 영양분을 주어 살게 하기보다는 받아먹은 이웃에게 배탈을 일으키게 하여 오히려 해를 입힐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올곧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웃에게 배탈을 일으키지 않고 생명을 줄 수 있는 “생명의 먹이”가 되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짐승처럼 죽게 된 우리를 본래의 사람의 모습이 되어 살아날 수 있게 하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으로 올라가 알몸이 되어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으로 올라가 십자가의 죽음을 치러 내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통해 참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에 자신을 온전한 먹이로 변화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이웃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해골산으로 올라가 ‘짐승처럼 된 세상에 속한 자신에게서 죽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빛이시며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닮은 본래의 나 자신 되찾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오 22, 37)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 계명을 올곧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그분의 참다운 아들이 되고,

그분의 아들로서 자라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님과 같이 “이웃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먹이”가 되면 자신의 몸 전체를 이웃을 위하여 내어줌으로써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38절)는 둘째 계명을 올곧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그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님과 같이 “완전한 사람”(마태오 5, 48)이 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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