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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13 【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7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16 조회수1,899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늘땅나13]【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7

나를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떻게 다루어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나를 내신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나 자신을 다스리려 애를 써도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태오 26, 44)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마음대로 내 몸은 잘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그런 내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의 마음’입니다.

‘나를 내신 분께로 향하는 나의 마음!'

당신을 차지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을 버릴 ‘가난한 나의 마음!’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분 앞에서
겸손되이 머리를 숙이는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 뿐입니다.

그분은 이미 나를 내시기 전부터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으로 ‘당신께로 향한 나의 겸손된 마음’만을 원하시기에 그 마음만을 보시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약한 본성을 지닌 나”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당신께로 향해 이끌어 들여 주십니다.

죄를 지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사실을 모르거나
죄를 짓게 하시려고
약한 본성을 지니도록 만드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물론 없고, 하느님께서 모르고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안에 당신의 풍요로움을 넘치도록 채워주시기 위해서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만들어 주신 그 사랑”을 가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당신께로 향해
나아오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

어렵고 힘겨운 뜀박질 끝에 오는 희열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그 마음! 당신께 달려오는 아이에게서 조금도 눈길을 떼지 않으시고 가슴조리며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분은 혹여 내가 넘어질세라 그 길에서 장애물이란 장애물은 다 치워놓고 길을 반듯하게 잘 닦아놓고 기다리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자비로우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는 아이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너무나도 엄청난 상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아이를 위해서 마련되었고, 그 상을 주시기 위해서 뜀박질을 시키신 것이고 ‘그 상급은 영원히 아이의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일’이 밥 먹듯이 쉽게 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다면 상을 받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참으로 냉랭하지 않겠습니까?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똑같은 죄를 수도 없이 거듭거듭 짓고 또 지으면서 그래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아버지께로 향하여 달리고 또 달리는 아이를 사랑이 넘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어찌 돌보아주지 않으시겠으며 어찌 내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수도 없이 죄를 짓고 또 지으면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계속 뉘우치고 결심하며 “고해 성사”를 보며 아버지께로 향해 달리는 아이는 마치도 마라톤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 남들이 안 하는 고된 훈련을 피땀 흘려가며 끊임없이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고된 훈련을 하지 않아도 42.195Km 마라톤 코스를 잘 달릴 수 있다면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의 영광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죄에 빠지는 ‘약한 본성을 거슬려 덕에 나아가는 일’이 참으로 힘든 일이기만 하기에 그 일은 ‘참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며 그렇기에 마침내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아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씌워주실 “영광의 월계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먹고 마시며 끊임없이 줄지 않는 참 행복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자격증”입니다.

“영광의 월계관”을 받아쓰고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먹고 마시며 끊임없이 줄지 않는 참 행복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자격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라 나아가는 길은 단 하나인데 그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기 저마다의 독특한 모습으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지니고 달려갑니다.

마치도 옹기장이가 옹기를 만들 때에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로 만들지 않고 각양 각색으로 만들어 내듯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어내실 때에도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지어내셨기에 다양한 옹기의 쓰임새가 서로 다르듯이 서로 다른 사람의 쓰임새도 각기 다르고 ‘사람마다 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의 모양새'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르게 “각자에게 맞는 거룩한 삶의 형태(성소:聖召)”를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 하나는 “독신 성소”이며 또 하나는 “결혼 성소”입니다.

어느 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행 한 까닭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며, 결혼한 그 상태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오 19, 3~12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 생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천지 창조 때부터 마련하신 거룩한 생활입니다. 독신 생활 또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부모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홀로 서기를 해야할 시기에 이르면 각자에게 주어진 사랑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부모의 슬하를 떠나 자신에게 맡는 장소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 선택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관여할 수 없고, 오로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지어집니다. 그런데 각자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에 맞는 “자기 고유의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크기와 모양새와 그 쓰임새가 다 다르게 만들어진 옹기가 각기 맞는 장소에서 그 쓰임새에 따라 쓰여져야 하듯이, 사람도 주어진 능력에 따라 있어야할 장소가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농부의 손에 들려있는 밀알 스스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선택할 수 없듯이, “사람”도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모든 여건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자기 스스로 마련할 수도 없으며, 다만 자기를 내신 분의 뜻에 따라서 사건이나 사물이나 사람을 통해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밀알과 다른 점 밀알은 아무런 의지도 없이 농부에 의해서 준비된 자리에 뿌려지고, 사람은 자기를 내신 분의 뜻에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여 그분의 뜻을 찾아내고 그 뜻을 따르기로 ‘스스로 작정하여 실행한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른 결혼 생활과 독신 생활 안에서 어떻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가 자신을 깨끗이 만들고 사랑을 올곧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대상”“삶의 모습”은 다르나 결혼 생활이나 독신 생활이나 똑 같이 먼저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더러움을 말끔히 몰아낸 다음에 사람을 살려 낼 수 있는 “생명의 빵”이 되어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온 몸이 다 소멸될 때까지 내어주므로 사랑을 올곧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을 충실히 하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구와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자신이 얻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것들을 거스르는 생활을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전히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그분만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속한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서 죽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님과 같이 부활하여 마치도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은 후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어 빵이 되듯이 하느님의 아들로써 새롭게 태어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오 22,37)는 첫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된 후에 많은 이들 앞에서 ‘자신의 알몸’ 드러내고 ‘자신의 온 몸’ 먹이로 내어주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을 지키는 사람으로 ‘자신의 몸을 먹는 사람 모두를 살려낼 수 있게’ 됩니다.

“결혼 생활 안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창조주께서 만들어주신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따라 부모를 떠나 자신의 배우자 앞에서 ‘자신의 알몸’ 드러내며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배우자와 한 몸을 이루며 일상 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온 몸(육신?시간?지능?재능?경험 등)'을 배우자에게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내어준 그만큼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그만큼의 공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워”(1계명 실천)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자녀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먹이로 내어줌으로써 그들을 살려낼 수 있게(2계명 실천)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삶이 “더 옳다. 그르다”거나, “더 좋다.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소중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주신 분의 뜻에 맞게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에 걸맞은 길을 잘 찾아내어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소 안에 있는 사람이든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로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참 행복을 얻어 누리며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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