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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14]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8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17 조회수2,661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늘땅나 14]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8

“참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생소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쉽게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닮기 위해 “참 행복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스스로 주인인줄 알며 없어져 버릴 땅의 것을 욕심을 내므로 짐승처럼 된 자신의 더러움을 없애고자 실생활 안에서 겪었던 부끄러운 이야기들, 또 주위의 모든 사람이나 사건을 통해 그 더러움을 없애주시고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시기 위해 끊임없이 개입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돌보아주신 일들, 이 과정을 겪기 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었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참사람이 되고자하는 굳은 의지’와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심’으로 고뇌하고 탄원하며 쓴 제 일기까지 삽입하여 설명을 곁들여 보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오로지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저를 살려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 예수 그리스도님께만 의탁하며, 제 안에 살아 계신 그분을 뵙기 위해 그분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갔는데, 그분은 교만하기 이를 데 없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저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당신의 것을 다 내어주시어 어머니 뱃속에 생길 때의 모습이었던 ‘아름답고 찬란한 당신을 닮은 본래의 어린 아기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린토 1서 2, 1~5)” 라고 하였는데, 저도 그렇게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보여드리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참된 행복의 길로 걸어 온 제 삶”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게 만들어진 모든 사람의 삶”이 될 수 있기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다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다 보여드린다는 것’ ‘알몸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짐승처럼 죽게 된 세상 모든 사람을 태초의 모습대로 되돌려 놓으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저보다도 먼저 2000년 전에 어린 아기가 되시어 ‘알몸’으로 태어나시고,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는 어른이면서도 ‘알몸’인 채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알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이유는 다만 하나!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짐승처럼 죽게 된 모든 사람이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 ‘알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짐승의 상태에서 죽고 당신께서 마련하신 ‘참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흰옷’으로 갈아입고 ‘하늘나라 임금님의 아들이신 당신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영원히 당신과 함께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죄악을 없애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산에 올라가 옷 벗김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알몸’인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많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 달리셨습니다.

그분은 먼저 “당신의 알몸”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알몸”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남김없이 내어주시어 ‘당신의 몸을 먹고 영원히 살도록’ 해주십니다.

저도 이제 저를 살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님과 같이 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알몸’인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려있고자 합니다. 제가 어른이었을 때에는 제 ‘알몸’이 드러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남 앞에 드러나지 않도록 꼭꼭 싸매며 감추려 애를 썼지만, 이제 그분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기”가 되었으니,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기에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럴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더러워진 자신의 어른스런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자하는 사람이 반드시 걸어야 하는 ‘십자가의 길’ 끝까지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는 “어린 아기”입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서 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오 18, 3 ~5) 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 모두가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남보다 더 커지고 싶고, 남보다 힘이 더 세어지고 싶고,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남을 도와주는 입장에 서 있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작고, 힘없고, 보잘것없기에 남의 도움만을 필요로 합니다. 넘어져 더럽혀지고,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하며 어른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어른이 일으켜 주고 닦아주는 대로, 용서해 주는 대로, 받아 주는 대로 다 내어 맡기며 있는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소년이나 어른이나 노인이 된 사람들이 “나는 어린이와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잘못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허례허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일부러 자기의 몸을 더럽히지 않으며 더러워졌다 해도 그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코 7, 14~15) 라고 말씀하시며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시기를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마태 18-19) 하시며,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20-23에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라고 하셨습니다.

성서에 “착한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언 24,16) 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어린이도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느끼고 더러워지며 살아갑니다. 다만 “어린이와 같이 된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고 참된 행복의 길을 걸으며 마음 안에서 그 모든 악한 생각들을 빼어버렸기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모든 유혹에 스스로 빠지려하지 않게 되었으며 빠져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어른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 깨끗할 수 있는 것’은 마치도 ‘밀알이 땅 속으로 들어가 썩은 후에 싹을 틔우고, 자라 열매를 맺은 후 추수가 되고, 씻기어 반죽이 되고, 불에 들어가 익혀진 후에는 본래의 밀알 하나로서의 본질적인 모든 모습이 변화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과도 같이 땅에 속한 사람이었을 때에 마음 안에 지니고 있던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시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을 다 빼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온갖 더러운 것을 집어먹습니다. 흙이나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 심지어는 자기의 코딱지까지도...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뱃속에 들어갔다가 뒤로 그대로 나가지 결코 아이의 마음속으로는 파고들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흙이거나 그 어떤 더러운 곳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는데 만 정신이 팔려 이곳저곳에서 더럽혀집니다. 더럽혀진 상태에서 어머니에게 달려가면 어머니는 즉시 아이를 닦아주고 끌어 안아주고 뽀뽀해 주며 사랑해 줍니다. 그래서 아이는 그 사랑 안에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저도 이제 어린이와 같이 되어 알몸을 드러내고 얼굴에나 온 몸에 온갖 더러움을 다 묻힌다 해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남 앞에 제 몸에 묻어 있는 더러움이 보일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럽혀지면 그 즉시 실수나 잘못이나 부족함이나 약점이나 결점들을 아버지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깨끗이 닦아주시기를 간청하며 도우심을 구하면 됩니다.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은 제 마음속으로 들어와 저를 더럽히거나 제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며 닦아주시고 안아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안에서 마냥 행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껴지는 그대로를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자신의 일이나 남의 일이나 “예” 할 것은 “예” 라고 말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야고보서 5, 12 참조).

‘어린아이와 어른이 얼마나 다른가?’는 동화『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동화에서 어른들은 모두 임금님의 옷이 자기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체면이나 자기들에게 돌아올 어떤 이득을 위해서 임금님의 옷이 참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거짓말을 아주 쉽게 합니다.

자신들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거짓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어른... 어린아이는 자신의 체면이나 자신에게 무엇이 돌아올 것인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큰소리로 말합니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라고... 그 어린아이는 자신 안에 거짓이 없기 때문에 남들이 자신을 거짓되게 보거나 취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눈을 체면이나 자존심 등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교만심으로 겹겹이 둘러싸이게 하여 어두워진 어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들의 임금님이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도록 했으며, 아무런 욕심이 없어 깨끗한 눈을 가진 그 어린아이는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임금님이 더 이상 그 부끄러운 행진을 하지 않도록 막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자기의 몸에 묻어 있는 똥을 깨끗이 씻지 않고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면 그것은 꼴불견일 것입니다. 그러나 똥 묻은 개가 자신의 몸에 묻어 있던 똥을 아주 깨끗이 다 없앤 후에 너무나도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고 기뻐서 겨 묻은 개가 깨끗함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네 몸에 겨가 묻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몸에 묻은 겨를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주려 한다면 그것은 꼴불견이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눈!

“한 눈을 가진 원숭이” 마을에 “두 눈을 가진 원숭이”가 가면 “병신 원숭이” 취급을 받게 되듯이, 제가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한 모든 요소들을 없애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어린아이의 두 눈”을 갖게 되어 “한 눈(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에 속한 눈)을 감고 있는 어른”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불행하게, 부끄럽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네 몸에 이런 더러운 것이 묻었다. 그것을 없애고 눈을 떠라!"고 말할라치면 “남을 상처 주는 상종을 못할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가 일수였기에 어린아이로서 어른들 틈에 끼어 사는 것이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허영심에 들떠 벌거벗은 채로 행차를 한 동화 속의 임금님도 행차 전에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신하가 있어서 임금님의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받아들였을지 의문입니다.

어른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어린아이들의 생각이나 행동과 다르기에 어른들은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싫어하며 자기들의 일에 어린아이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것조차도 귀찮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자 그들을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며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습니다(마르 10, 13~16).

또한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서로의 더러움이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 어른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마태 23, 27-28, 33)하고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물론 그 어른들은 어린이와 같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동안 ‘어른들과 다른 어린아이가 되었기에’ 어른들 틈에 끼일 수도 없고 오히려 배척을 당했던 저이지만, 저에게 돌아올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그 어떤 불이익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자신의 마음 속)에서 누리는 참 행복의 맛”이 더 크고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벌거벗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얼마나 자유스럽고 행복한지를 만천하에 알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로도 행복한 어린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저 자신이 어른이었을 때의 똥이 묻어 더러웠던 모습과 그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으며 어떤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다 보여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하려고 하는 이 일도 어떤 어른들이 보시기에는 못마땅한 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근원지를 향하여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더 많은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하겠습니다.

내일은 제가 어떻게 참행복의 길로 들어섰으며, 어떻게 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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