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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15] 【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실생활 1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18 조회수2,276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늘땅나 15] 【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실생활 1
1972년 12월 대림시기부터 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때 저는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떼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앞길을 결정하고 스스로가 자기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성년’이 될 준비를 하는 중요한 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어떤 뚜렷한 목적의식이나 그 어떤 목표도 갖지 않은 채 세월에 떠밀리어 그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실업계인 상업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도 취직하는 데나 대학교로 진학을 하는 데나 그 어디에도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모든 일에 ‘열의’도 ‘성의’도 없이 열심 하지 못한 생활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얼마나 무심하게 살았는지 남보다 월등한 I.Q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시험에는 1,2차 다 떨어져 전신이 오라버니 모교인 감곡에 있는 매괴 고등학교와 함께 시작된 중학교에 그냥 들어갔고, 고등학교는 아무 생각 없이 지원을 했기에 시험 보는 날조차 까맣게 잊고, 친구들이 입학시험을 보고 있는 그 시간에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 들어 가 담임 선생님께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와서 아무런 꿈도 없이 그렇게 3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졸업시험을 끝내고 나서 문득, ‘내가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 이왕에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 가장 최고의 삶을 살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최고의 삶에로 나아가는 것일까?’ 하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
결국엔 모든 것이 다 물거품처럼 없어져 버릴 것들을 목표로 삼고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았는데, 여러 모습의 삶이 있었지만 아무 곳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였고, 세월이 지나도 조금도 변색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모두가 다 완벽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성인들”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다만 “자기 자신을 만들어 주신 분께서 뜻하시었던 목적대로 살다가 자기가 나온 곳으로 올곧게 돌아간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지로 잘 돌아가신 분들!
‘그분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간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사신 분들이라면 나도 그분들처럼 살아보아야겠다.’ 생각하니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살고 있을까?”
“나를 만드신 분이 누구일까?”
“그분이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은 어떤 분이실까?”
“나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까? 등 등.
물음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난 그 다음날부터 천주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저를 만드신 분이 누구이시라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그분이 어떤 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두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두 손으로 만져 본 적도 없고,
두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분에 대하여 도무지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느껴보기 위해서 고개를 위로 젖히고 두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해서 입 속으로 다만 이렇게 외어보았습니다.

“하느님!... 나!.... 하느님!.... 나!.... 하느님!.... 나!.... 하느님!.... 나!....”

한참을 그렇게 외우다 보니 하느님의 존재는 저의 머리를 뚫고, 제가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뚫고, 머리 위로 한없이 커져 나아갔습니다. 도무지 저의 머리로는 잴 수 없을 만큼 점점 더 커져 나아갔습니다.

땅 위에 있는 저의 존재는 그와 반대로 저의 몸을 벗어나 점점 더 작아지면서 아래로 한없이 내려가 전혀 볼 수 없을 만큼 먼지보다도 더 작아졌습니다. 그러한 느낌은 그 전에는 전혀 한 번도 느껴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차지한,
제가 바라볼 수 있는,
제가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공간을 넘어서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러한 공간을 차지하고 계신 분을
먼지보다도 더 작은 제가 감히
어떻게 바라볼 수조차 있었겠습니까?

한없이 크시고 빛이신 그분!

한없이 작고 작은 더러운 점 하나인 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감히 그분 앞에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까지 저는 저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때까지 저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기준이 되는 잣대를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제 그 기준이 되는 잣대를 하느님께 두고 보니 하늘과 땅 만큼보다도 더 큰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해야 그분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분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주 작고 더러운 점 하나인 저”를 들여다보려 하였지만 도저히 들여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오는 모든 순간에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꼭꼭 싸매며 밖에 있는 것들만 바라보며 살아왔기에 그 껍질도 단단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조차도 뜨여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많은 애를 쓴 끝에야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약점, 결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제게 있던 “안젤라 성녀”에 관한 책에 그분이 자신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약점, 결점들을 알아내어 나열해 놓은 것을 보고 저도 그 흉내를 내보았습니다.

그 일도 처음에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계속 애를 쓰다 보니 조금씩 저 자신에 대하여 알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약점, 결점, 나쁜 습관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말이 너무 많고, 무슨 일에나 결단력이 없고, 끈기가 없어 무슨 일이나 끝까지 하는 일이 없고, 남에게 의지하기를 좋아하여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너무나도 게으르고, 군것질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화를 잘 내고.....등 등.

스무 가지도 더되는 것들을 겨우 알아내어 적어보았습니다(1984년 7월 십자가의 길 12처에서 죽기 직전에 애착심을 버리기 위해서 태워버림).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내려 애를 쓰며 성인들의 전기를 읽어보고, 그분들이 직접 쓴 글을 읽어보고, 참고가 될 만한 글이면 닥치는 대로 읽던 중에 아주 오래된 책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도 죄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는데, 그 말씀은 제게 아주 큰 충격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제 몸을 만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저는 그것이 전혀 죄가 된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께 딱 두 번 회초리로 매를 맞았는데, 한 번은 초등학교 때에 외딴 집에 살면서 건너편에 하나밖에 없는 친구와 싸워서 말을 하지 않았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나 스스로의 동의 없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무조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 대하여 불만을 갖고 “죄도 없는데 무엇 하러 고해 성사는 봐야 한담!” 하고 불평하며 일부러 부활 판공 때 고해성사를 보지 않았을 때(1968년)였습니다.

그 후로는 판공성사 때마다(공소 신자) 의무적으로 고해 성사를 빼먹지 않고 잘 보았었는데, 1972년 12월 성탄 판공성사를 보아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자신의 몸을 만진 일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래서 그해 판공성사 때에 고백을 하지 못하고, 이듬해 사순절에도 일부러 날을 잡아 본당에 찾아갔지만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주십사고 말씀도 드려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부활 대축일에 공소 예절을 하고 내수에 있는 오라버니 신부님에게 갔는데, “너 미사 참례했니?”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니오.” 라고 했더니, 오라버니는 두 말도 없이 성당으로 갔습니다. 제게 성체를 영하게 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차마 “저 성체 영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오라버니 하는 대로 따라가서 간단한 예절에 참례하고 성체를 영했습니다. 기쁘고 감사해야 할 영성체가 그렇게 곤혹스럽고 괴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고해성사를 보지 않은데다가 하나를 더 얹어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라버니에게 고해 성사를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차마 부끄러워 할 수가 없었고, 청주에서도 할까 했지만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 되었습니다. 장호원으로 미사 참례하러 갈 기회가 생겨 언니와 함께 가서 고해 성사를 보았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하든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것 같다.’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죄 있음을 발견한 죄인은 너무나도 죄송하고 송구스러워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 8) 라고 말씀드리게 되는데,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 10)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7)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당신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들을 친히 부르시어 당신과 같이 “참 사람”이 되게 하여주시고 “사람을 살리는 일(사람 낚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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