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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16] 【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실생활 2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19 조회수1,515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늘땅나 16]【 참 행복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실생활 2

¶ 14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 14~17

잔치에 온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함께 즐기지만 신랑을 빼앗기면 그들도 “단식”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고자 나서려고 하였지만, 자신이 너무나도 더럽고 부족하기만 하여 감히 그분 앞에 나설 수조차 없는 처지이기에 제가 죄인임을 느끼는 그 때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에서부터 “극기”“단식”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기 싫어서 미루고 또 미루며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때 할 수 없이 하던 설거지나 청소를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서 하시던 밭일도 틈틈이 도와드리고, 매일 매일 먹던 사탕이나 빵 등. 좋아하던 군것질을 줄이고 일부러 쓴 오이 꼭지를 먹으며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너무나도 갑자기 무리를 하여 “극기” “단식”을 한 결과 계속 편하게 쉬기만 하던 육신이 놀랐는지, 그 해 5월에는 심한 급성 신장염에 걸려 단백뇨와 혈뇨로 인해 소변이 완전히 새까맣게 되고 몸이 뚱뚱 붓고 황달까지 와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병은 9개월 동안 치료를 해서야 소변이 정상이 되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만 피곤하면 몸이 붓게 하며 늘 제 몸 안에서 그 때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전에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고 살 때에는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남들이 얻으려고 애를 쓰는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기에(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아주 좋다고 하는 사람들의 2배도 더되는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학교 다닐 때에 한 번도 “1 등”을 해본 적도 없고, 중학교 입학 시험에도 떨어지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 날짜를 잊어버려 시험도 안보고 실업계인 상업학교에 들어갔으며, 대학 입학 시험은커녕 예비고사에서도 떨어지고, 상업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직을 해보려는 마음조차도 갖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참 행복”, “나의 목적”, “완전한 사람”, “성인”이라는 새로운 흥밋거리 앞에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사고와는 반대되는 ‘새로운 사고’를 갖게 되었으며, 이전의 행동과는 반대되는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주보다도 더 크시고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한없이 깨끗하신 하느님 앞에서 너무나도 작고 더럽고 보잘것없는 자신 바라보며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분과 하나되는 그 날을 위해 새롭게 출발한 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떤 삶의 형태를 선택해서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던 중에 먼저 이 세상을 가장 잘 살다 가신 성인들의 전기를 읽어보았는데 그분들의 삶은 참으로 다양하였습니다.

왕도 있고 거지도 있고, 주인과 노예, 결혼을 한 사람도 있고 안한 사람도 있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세상의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참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다양하게 성인이 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형태의 삶을 통해 그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많은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삶을 놓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개미 마을의 마리아』란 책을 보고는 ‘나도 넝마주의가 되어 볼까?’, 『진흙탕 속에서』란 책을 읽어보고는 ‘나도 거리에 나가 걸인들과 함께 생활해 볼까?’, 아니면 ‘공장 기숙사에 가서 생활해 볼까?’ 하고 별의 별 생각을 다해 보았지만 그런 생활은 겁이 나기도 하고 용기도 나지 않았고, 아버지가 공소 회장 이어서 아이들 첫영성체 교리를 가르치면서 그 아이들을 통해 어릴 때의 가정 교육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았기에 ‘결혼을 해서 내 아이들에게 가정 교육을 잘 시키며 그 일을 충실히 하므로 성인이 되는 길로 나아가 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결혼 생활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성인이 된 분들을 많이 볼 수 없었고, 그분들 중에서도 결국에 가서는 혼자 살면서 거룩함의 길로 나아 간 분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된 수도 생활이 더 거룩함의 길로 나아가는 안전한 길이겠지!’ 하고 생각하고는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마음 안에서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던 사람까지도 떨쳐버리고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1975년 성소주일에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열린 ‘성년 행사’에 참석하고 나서 여러 수도회 중에서 선택한 곳은 한국에 진출한지 얼마 안되어 식구가 불과 11명밖에 되지 않고 교육사업을 하는 분위기가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편지를 내고 찾아가 보기도 하면서 입회를 결심하고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녀님들이 집에 방문을 오고, 신체검사를 하고, 피정에도 참석하고, 모든 분들이 저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며 외적으로는 아무런 하자 없이 모든 일은 다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인성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인성검사의 질문지에 답하고 있던 자신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참으로 많이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지에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자신에게 있었던 많은 일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질문들로 가득 찼는데, 그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온 후에 아주 간단히, 아주 쉽게 끝낼 수 있는 문제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이렇게 대답할까?’, 아니면 ‘저렇게 대답할까?’를 궁리하고 있었던 자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은 그 인성검사를 맡았던 의사에게도 그 수녀원 측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나 자신 혼자만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망설였던 질문은 ‘남의 물건을 훔쳐본 적이 있는가?’,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거나 만져 본 적이 있는가?’ 등등. 자신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었는데, 거기에 저촉이 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이 무엇이 그리도 큰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저는 그 일로 인해서 그 수도원에 가는 것마저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성검사에서 나왔던 여러 가지 질문들에 깨끗이 “예”라고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의 작은 허물들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첫영성체(8세. 1961.8.14) 이전에 남의 집 대추를 두 갠가 따먹은 적이 있었고, 찬장 서랍에서 엄마 몰래 동전을 꺼내다 달고나를 사 먹었고, 옆집 가게에서 사탕을 하나 훔쳐먹는 적이 있었기에 ‘남의 물건을 훔쳐본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고,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거나 만져 본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도 깨끗이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고, 그 외에도 저촉이 되는 질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남의 허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밖으로 드러난 남의 허물을 크게 보며 그 허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빛 자체이시며 우주보다도 크신 하느님 앞에서 작디작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인간이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할 것이며 크면 얼마나 클 것이겠습니까? 또한 눈에 보이게 ‘밖으로 드러난 행동’이 무엇이 그리도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은밀한 마음속까지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뜻과 맞지 않는 여러 가지 나쁜 마음을 없애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것인데, 저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눈에 보이는 나쁜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러한 엄청난 갈등을 겪은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저라는 사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큰 교만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중학교 1학년 때에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탁구실에 갔는데 친구들이 3일 전부터 탁구를 치기 시작하여 저보다 조금 더 잘 치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고3 졸업할 때까지 탁구를 거의 치지 않았고, 미술 시간에 연필로 하는 밑그림을 끝내고 처음으로 수채화 물감을 쓰는 날! 제가 생각했던 대로 색칠이 되지 않아 그림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그 때부터 고3 졸업할 때까지 미술 시간에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인성 검사를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기 전까지는 제가 그토록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었고,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교만심”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도 몇 배나 더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남들 앞에 겉으로 드러난 나쁜 행동을 많이 하고, 하지 않고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자기의 탓’ 아닌 그 사람의 ‘가정 환경’이나 ‘가정 교육’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각 사람의 그러한 모든 사정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 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는 남을 절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마태오 7, 1~5 참조)

저는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기에 친구들한테 욕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자랐는데, 제가 만일 전혀 종교적이지 못한 가정에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면 사정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가득치 있는 것들입니다.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낮추어 보고 자신을 남 앞에 높이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일곱 번이나 살인한 죄인 쁘란찌니라는 사람의 회개를 위해 힘쓰며, 자기의 희생으로 그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시면 평생을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희생하며 보속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주님께 말씀드렸는데,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쁘란찌니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살인자 쁘란찌니는 교수대에 목을 들이밀기 직전에 회개했다는 증거로 돌아서서 신부님이 들고 있던 십자가를 빼앗아 세 번이나 입을 맞추었고, 그 소식을 들은 소화 데레사 성녀는 과연 평생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사셨으며, 그분의 기도와 희생으로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여자를 끌고 온 사람 중에 그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의 오른편에 달려 있는 죄수에게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나쁜 행동을 한 것을 크게 생각하며, 자신이든 남이든 그러한 행동 여부에 따라 ‘죄인이다’, ‘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에 보면 ‘눈에 보이는 행동’과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것’ 아무런 구별 없이 똑같이 취급됩니다. 예를 들면 ‘6. 간음하지 말라’와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가 그렇고, ‘7. 도둑질을 하지 말라’와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가 그렇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나 마음속에 있는 것이나 똑 같은데,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육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재미있는 사실은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게 나쁜 행동을 더 많이 한 사람이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게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 근원이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기가 훨씬 더 쉽다’ 것입니다.

왜냐 하면, 드러나게 나쁜 행동을 많이 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죄를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서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드러나게 나쁜 행동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은 남이 보기에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기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사셨던 그 때에도 세리나 창녀나 모든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님의 말씀을 더 잘 받아들이고 하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영광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눈에 보이게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의 ‘죄의 크기’를 보시는 분이 아니시며 당신께로 돌아서는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얕보지 아니하시는 분”(시편 51, 17)이시거늘 저는 제 자신이 눈에 보이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아 ‘백짓장처럼 깨끗한 사람으로 남이나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더 크게 생각’하였기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픈 마음으로 가득 차 심한 갈등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한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인성 검사를 맡았던 그 의사가 ‘많은 세상 경험이 있으니까 나의 이 갈등을 해소시켜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청해 보았는데 허사였습니다.

자신 안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인간에게서 커다란 실망을 겪은 후에야 진정 제 안에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실 분은 오직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오 9, 13ㄴ, 12) 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뿐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어, 제 안에 속속들이 박힌 ‘교만심과 하느님께 대한 불순명의 요소들을 없애기 위하여’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어떠한 처지에서건 오로지 그분께만 의지하고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더럽고 추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저 자신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해골산으로 향하신 그분만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따라 나선 이후 저는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서 짓고 또 지으며 지금에 이르면서 고해 성사를 볼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 저의 죄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낀 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왜냐 하면, 저는 그 죄로 인하여 저 스스로를 조금도 높일 수 없었으며 언제나 죄인이었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약한 인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거나 부끄럽게 여기는 나쁜 습관을 쉽게 고칠 수 있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저의 죄를 씻어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 그리스도님”이 제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약한 죄인이었기에 십자가에 달려 계신 그리스도님을 따르는 일이 제게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심과 은총”이 또한 제게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그분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보잘것없고 약한 저”를 언제나 “만족”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부활성야 ‘부활찬송’중에서)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죄”를 없애주시려고 창조주이신 드높으신 분께서 자신을 낮추어 피조물인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오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 2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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