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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19 【 참 행복 2】 “슬퍼하는 사람" 3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22 조회수1,724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늘땅나19]  참 행복 2슬퍼하는 사람" 3

2장 예수 그리스도님과 함께 어둠의 골짜기로

세상과의 싸움의 장
‘어둠의 골짜기’‘새롭고 밝은 빛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 밖에 없는 좁은 통로’입니다. 이곳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기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깃들이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땅 속!
연어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수천의 삶을 살고자 자기가 내려 온 원천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계곡!
사람이 땅의 것을 욕심내고 취하므로 가죽옷을 입고 두 손을 땅에 대어 ‘짐승처럼 된 몸’을 일으켜 두 손을 하늘로 치올려 참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
사람이 죽음의 관문을 거쳐 내려오면서 더럽혀진 ‘죽음(짐승)의 흔적’을 없애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이란 나를 살려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친히 걸어가신 사랑의 길입니다. 이 길은 결코 고통의 길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이 길을 걸어가다 보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한없는 주님의 사랑이 듬뿍 배어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어둠의 길로 나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라고 희망에 찬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1처 사형 선고를 받다.

죄목 : 하느님을 모독한 자. 자칭 유대인의 왕.↔ 하느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 I.N.R.I.
Iesus예수. Nazarenus나자렛 사람. Rex왕. Iudaeorun유대인들의.

: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
극악 무도한 죄인에게만 내리는 형벌.
예수 그리스도님 ↔ 세상
하느님의 아들 ↔ 하느님을 모독한 자 - 극형으로 죽임.

백성들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루가 23, 21) 라고 외침.

예수 그리스도님 :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모독한 모든 죄를 기워 갚기 위해 당신 스스로 ‘하느님을 모독한 자’가 되시어 ‘사형 선고’ 받으셨습니다.

오랫동안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밤새도록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며 온갖 모욕, 조롱, 멸시, 천대받으시며 거짓 증언을 듣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으로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신 후에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형 선고’ 받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 오래 전부터 준비하시고 예고하신 일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교만과 불순명으로 인해 단절된 당신과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가장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오 18, 14

십자가 : 하늘(영원한 생명)과 땅(죽음이 만연한 곳 - 어두움의 세상 - 마귀 지배)을 잇는 다리.

 

 

 

 

 



하늘과 땅의 교통이 단절된 그 곳!
죽음의 관문(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창조된 사람이 원죄로 말미암아 죽을 몸이 되어 없어질 세상 속으로 내침을 받는 곳)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친히 못 박히시기 위해 아무런 반항도, 거짓 증언에 대해 한마디 대꾸도 않으시고 부당한 그들의 판결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기 위해서 농부에 게 선택을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농부는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많은 밀알 중에 좋은 밀알만을 고릅니다. 알이 굵고, 실하고, 흠 없이 잘 익고 잘생긴 것을 골라 밭에 씨앗을 뿌립니다. 농부가 씨앗을 어디에 뿌리든 밀알은 온전히 농부의 손에 자신을 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농부는 미리 밭을 준비하고, 돌을 골라내고, 흙을 곱게 바수고, 알맞은 거름과 물을 주고, 그 씨앗에 맞는 시기와 장소를 잘 알아서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장소에 뿌리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밀알을 선택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많은 씨앗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씨앗들은 ‘종족 보존’이라는 ‘지상 최대의 사명’을 안고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씨앗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씨눈’입니다. 왜냐 하면 그 씨앗이 얼마나 싹을 잘 틔우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가 ‘씨눈’이 얼마나 잘 여물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씨눈을 둘러싸고 있는 겉껍질’은 씨눈이 싹이 틀 때까지 씨눈을 보호하고, 속껍질은 씨눈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을 합니다. 그 사명이 다 끝나면 껍질은 아무 소용이 없어져서 썩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씨눈도 지상 최대의 사명인 ‘싹을 틔우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마침내는 썩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씨앗에 비겨 말하자면 “씨눈”은 언제나 자기 자신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닮은 나”이며, “껍질”은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나”입니다. 씨앗 하나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속하므로 끊임없이 살 수 있듯이 사람도 세상에 속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영원히 죽지 않게 만들어진 “참 나”를 찾아내야만 끊임없이 살 수 있습니다.

밀알을 바라봅시다!
어떤 밀알은 작고 어떤 밀알은 큽니다. 어떤 밀알은 홀쭉하고 어떤 밀알은 통통합니다. 저마다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형태가 얼마만큼 다른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밀알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입니다.

사람을 바라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자신의 겉모습”(세속적인 조건 = 생김새, 지능, 재능, 학벌, 재산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로 인해 자만심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이며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코 “나”의 것을 빼앗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욕심을 부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므로 인해 “불완전하고 유한한 짐승을 닮아 죽게 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것들을 죽여 없애야만 당신께서 만들어주신 “참 나”를 찾아 영원히 살 수 있게 됨을 아시기에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판단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나의 껍질을 계속 보존하는 것을 고집하다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 종족 보전이라는 지상 최대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의 껍질을 버리고 씨눈을 틔워 많은 열매를 맺고 영원히 살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창세기 1, 27-28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 17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의인”이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죄인”이란 “스스로 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1처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나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길 떠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재판관”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한없이 크고, 높고, 깊고, 넓고, 빛 자체이신 하느님과 맞지 않는 자기 자신의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에게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자신의 더러움을 없애주실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빌라도 앞에 사형수로 서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처럼 “십자가의 사형 선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요한 19, 10b.11b)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 스스로 그 십자가의 사형선고를 받아들이고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 "예, 저는 큰 죄인입니다. 저에게 큰 벌을 내려주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누리고 계시는 온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저를 어머니 뱃속에 생기게 해주셨고 저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선택하여 행하도록 하셨는데,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의 행복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당신의 얼굴을 마주 뵈올 수조차도 없게 제 몸과 마음을 더럽히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가 15, 19) - 제 죄를 다 기워 갚을 수 있도록 제게 맞는 일을 주십시오. 제 죄를 기워 갚기 위해 어떤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제1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과 반대되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무시와 천대, 배은만을 드린 즉,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그 죄를 기워 갚기 위해, 또한 하느님과 맞지 않는 ‘나 자신의 교만과 불순명을 쳐 이기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받아들일 굳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시작은 반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나 스스로 하느님을 모독한 극악무도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사형 선고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은 하나로 묶여 있으며(등뼈), 그분은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내가 이 길로 나아가는 일을 시작한다면 이 길에서 벗어나도록 그냥 놔두시지 않고 반드시 끝까지 갈 수 있게 나를 붙들어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의 첫 관문인 이곳은 십자가의 길에서 아주 중요한 관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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