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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저 세상 부활은 이 세상 겸손에서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25 조회수1,262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은 가톨릭 교리의 핵심이다. 우리가 부활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신앙은 단순히 죽은 신앙일 게다. 사실 못된 사두가이는 부활을 믿지 않아도, 대부분은 그래도 부활을 믿었다. 부활은 믿음의 바탕이자 복음 그 자체이다. 부활 없는 믿음은 죽은 거고, 복음도 거짓일 게다. 부활은 우리 삶 그 자체이리라.

 

예수님은 이런 사두가이들의 부활 신앙에 일침을 가하셨다. “저세상에서는 더 이상 장가드는 일, 시집가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온전한 사랑의 나라이기에 인간적인 에로스 사랑 따위에는 매달리지 않는다는 거다. 그곳에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 천사같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터득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게다. 다행히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는 것도 독서나 학습을 통해 우리 삶의 질적 차원을 상승시킨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인 부활후의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하늘 나라는 삶의 질적 행복은 물론,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준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는 이 현세의 삶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짝 만나 시집장가 가는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되는지를 예수님께 따졌다. 사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 나라는 죽음과 악연 등의 고통이 없는 온전한 기쁨의 세계일게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감동 없는 그런 모습은 결코 아니리라. 전혀 우리가 상상도 못한 완전히 새로이 변모된 삶이라나.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닌 깨달음이다. 건전한 상식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다. 이 세상의 인연과 삶의 흔적이 저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될 이 간단한 걸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겸손해야 할 게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죽은 이가 다시 저 세상에서 살아난다는 믿음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를 게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 조건이기에.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한 하느님 자녀이다.” 이 세상 살면서 부활이 뜻하는 초월적 세상에 대한 정신의 눈을 밝히는 것이 신앙인의 여정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철학자의 모습을 한 조각씩 간직한 채 산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가슴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진지한 의문들이리라. 우리는 하루하루 선행을 베풀며 믿음을 단련시키자. 그러면 저세상 삶의 부활의 영광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부활,사두가이,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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