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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23 【 참 행복 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2처 3 - 실생활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26 조회수1,311 추천수0 반대(0) 신고

#참행복 23

참 행복 2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2처 3 - 실생활
(*이글은 계속 읽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참행복 누르시고 처음부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실생활>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하여졌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본래 모습인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또한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기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을 시작할 때가 왔습니다.

분명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고통을 피하는, 창피 당하지 않으려는 그 어떤 마음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써 고통당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는데 그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로 하고 먼저 지난번에 밀어두었던 결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결혼 성소가 제게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곧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덟 살 때 옆집에 살고 있던 언니(그 당시 고1)가 “사람이 꼭 필요한데 올라와라” 라고 전화를 해서 올라가 보았더니, 말로는 ‘가게 일을 도와 달라.’ 것이었지만 실지로는 시동생의 결혼 상대자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때가 왔구나.’ 생각하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만’ 하겠기에 아예 거소도 그 집으로 정하고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만 빼고 그 사람과 늘 함께 지내게 된 것이었지요(1976년 9월 7일부터). 그 언니가 저를 택한 이유는 그 집안 모든 주권을 온통 자기 손아귀에 잡으려는데 제가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상업 학교를 나와 주제에 취직도 못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거든요.

또, 제가 ‘이건 분명히 내가 져야할 십자가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언니가 두 아이를 둔 과부였는데, 여차하면 그 두 아이를 제게 맡기고 재혼을 하고 싶어 하며, 그 남자 또한 저로 인하여 용기백배하여 그 동안 형수에게 눌렸던 가슴을 펴고 힘있게 일을 하였으며, 시어머니 될 사람도 그것을 보고 너무나도 기뻐하였고, 신기하게도 저도 그 사람의 모든 결점, 약점까지도 사랑하고 받아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개월이 되었을 때에 그 동안의 모든 일을 통해 ‘이제 모든 것이 다 분명하여 졌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언니가 은연중에 방해를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최선을 다하여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다 받아들이려 하는데 언니가 편하지 않은 것을 보니 이곳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갈 곳이 아니구나!’ 하고 판단하고는 짐을 싸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1976년 12월 24일) 그 해가 가기 전에 저 스스로 결혼을 거부한 것이 아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수도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수도원 중에서도 가장 제 자신을 낮추고 교만심을 없앨 수 있는 수도원을 찾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제 안에 있는 교만심과 주님께 불순명하는 마음이 결혼성소 안에 있는 이들보다 더 크고 강하였기에 제 딴에는 ‘그 정도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그 사람하고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던 것이었음을 지금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77년 1월 11일부터는 “사랑하올 주님! 제게 고통을 주십시오! 제가 당신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줄 고해 사제를 만나게 하여주십시오! 아울러 당신의 영광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제게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며 54일 9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33군데의 수녀원 중에 저 자신을 가장 낮출 수 있는 수도원을 찾아보니 두 군데 수녀원만 국졸 이상 받아주는 곳임을 알게 되어 그 두 군데 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결심했었는데, 드디어 1월 23일에 그 중 한 수녀원을 찾아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까지
다 들어맞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에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무나도 반가웠습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결혼을 포기하는 일이 힘이 들었었는데, 이제 금상 첨화로 그 일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로도 자신을 높일 수 없도록 그곳 수녀들은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으며, 수도복도 나일론이었는데 ‘사철 한 벌을 가지고 입는다.’ 고 하였고 다른 수도회에서조차도 인정을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모든 조건이 다 맞아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 날 면접 때 다른 수녀원을 보류한 일과 결혼하려고 했던 일과 이제 그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자 면접을 맡은 부원장 수녀님은 너무나도 환하게 웃으며 “그럼 한 번 살아봅시다. 한 달 동안 지원자로 살아보고 양쪽 다 좋으면 그 때 결정합시다!” 하며 흔쾌히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그 날!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제 자리”를 찾은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모든 것 다 버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떠나 왔던 본향을 향해 떠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두려움보다는 “제 자리를 찾은 기쁨”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 다음 날인 1월 26일에 드디어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를 수 있는 곳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한 달 후 모든 것이 완전히 결정이 났습니다. 입회 허락을 받은 것이지요. 이제 모든 것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허락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너무나 기뻐서 성당으로 달려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 1-4

드디어 2주 후인 3월 5일!
54일 9일 기도가 끝나는 날’에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버지로부터 멀어져 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아버지께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 길은 참된 목자이신 주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곧은 길’이기에 이 길이 아무리 험한 ‘어둠의 길’일지라도 아무 것도 무섭지도 않고 아무 것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이곳은 나에게 가장 적절한 땅!
나의 모든 더러운 껍질을 온전히 썩혀 없애고 열매를 맺기 위한 ‘씨눈’ 키울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내 자유의지로 빛을 거부하고 어두움을 택함으로 인해서 더럽혀진 몸 안에 숨어있는 더러움을 온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길! 그 안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9, 14~15)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자신의 더러움으로 인해 신랑을 맞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눈이 짓무르고 더 이상 밥도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처지가 된 제가 이 길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몸속에 있는 더러움을 없애고 기꺼운 마음으로 신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더럽게 만드는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의 근원을 찾아내어 뿌리째 뽑아내는 일입니다.

그 일을 더욱 더 잘 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몸속에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심을 절제하는 일’“이웃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저도 빼앗긴 신랑을 되찾기 위해 십자가의 길 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식”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늘려나가 일주일에 다섯 번까지 “단식”하며 “이웃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는데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며 더러움을 없애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없이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님의 도우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은 십자가의 길의 참 길잡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이 길로 걸어가셨고, 제게 이 길로 따라오라고 하셨기에 따라나섰지만,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결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 없이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로 향하여 나아가려고 하는 한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모든 해결책을 미리 다 마련해두시고 그리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계층의 모든 사람이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당신을 만나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당신의 대리자를 뽑아 세우시고 미리 그 자리에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십자가의 길의 길잡이인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제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당신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도록 제게 “당신의 대리자”인 “더없이 좋은 고해 사제”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2처)부터 세상 모든 욕심으로부터 벗어나 죽게 되는 그 순간(12처)까지 “눈에 보이는 길잡이이신 예수님”으로써 제게 힘이 되어주시고 저를 이끌어주셨습니다.

태초에 “빛이 생겨라!”(창세기 1, 2) 하고 말씀하신 “빛의 근원이신 신랑”을 차지하기 위하여 그분께로 나아가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고해 성사를 잘 보는 것’입니다.

죄인이기에 가는 이 길에서 죄를 없애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죄를 없애는데는 “고해 성사” 외에 더 좋은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해 성사”를 잘 보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 '영신적으로 바르게 이끌어줄 고해 사제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대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길』(성 바오로 출판사,1967,최민순 역) 4장 15절에서 “고해 사제의 세속적 경향이야말로 위험천만이요, 모든 수녀들에게 지옥이요, 해독을 끼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어느 의견을 따라야 할지 모를 적에 가장 현명한 방법은 어느 학식 있는 분을 찾아서 말씀을 드리고, 그분에게 고해 성사를 보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4장 14절)이라고 하며 '영신적인 풍부한 지식과 덕이 겸비한 고해 사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5장 3절에서는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첫째 주춧돌은 바른 양심입니다. 온 힘을 기울여 소죄를 피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고해 신부면 누구나 이런 것쯤은 알고 있겠거니 하겠지마는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나는 어떤 신부님과 양심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신학 과정을 다 떼신 분이었는데도 아무 것도 아닌 문제라고 말해 준 까닭에 나는 큰 해를 입은 일이 있습니다. 물론 나를 일부러 속이려 했거나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그는 더 이상 지식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이 말고 다른 두세 분하고도 그런 일이 또 있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완덕의 길로 나아가는데 고해 사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고해 성사를 잘 보는 일보다 제게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거의 2주에 한 번씩 고해 성사를 보았는데(2주에 한 번씩 성사 볼 기회가 있었기에), 성사를 보면 볼 수록 더욱 더 ‘고백해야 할 죄’가 많아지기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점점 더 죄를 많이 짓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죄를 점점 더 많이 지어서 ‘고백해야 할 죄’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추한 겉껍질을 없애면 없앨수록 빛이신 그분과 더욱더 가까워지기에 그 빛을 받아 더러움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도 양파 껍질을 까면 깔 수록 더 두꺼운 껍질이 나오는 것처럼 ‘이런 죄를 범하지 않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예전에는 전혀 죄라고도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엄연한 죄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두꺼운 속 알갱이 속에 더 이상의 막이 없음을 알 수 있듯이 그 더러움의 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 영혼의 신비여! 자연의 신비여!

그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처음에는 ‘이웃에게 해를 입힌 것이 저의 죄’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웃이 제게 도움을 청했을 때 도와주지 않은 것이 저의 죄’였고, 그 다음에는 ‘이웃의 바람대로 해주지 않은 것이 저의 죄’ 되었고, 마지막에는 ‘이웃이 느끼지 못하고 있는 영혼 사정을 도와줄 수 있게 저 자신이 깨끗하지 못함이 저의 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제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저 자신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려고’ 십자가의 길 안에서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저의 더러움을 없애려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인데, 1-3계명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관한 것이고, 4-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한 입니다.

마지막날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도 오로지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에 대해서만 심판하시겠다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오 25, 40. 45

‘죄를 짓는다는 것’
①계명인줄 알면서
②스스로
③어기는 것입니다.

계명인줄 알면서 스스로 어기게 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나의 주인이신 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나를 만드신 주님보다 나를 더 크게 생각하는 “교만심”과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깨끗한 사람이 되기만을 원하시는 그분의 뜻을 거슬려 나를 더럽게 만드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는 “불순명”입니다.

그 두 가지만 잘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며,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되는 날을 향하여 뼈를 깎는 아픔을 겪으며 자신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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