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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 미사 강론]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강론[2017년 11월 19일 주일(연중 제33주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28 조회수1,672 추천수1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news.va/en/sites/reflections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7.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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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71119일 주일 [연중 제33주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잠언 31,10-13.19-20.30-31

화답송 : 시편 128(127),1-2.3.4-5( 1ㄱ 참조)

2독서: 테살로니카 1  5,1-6

복음 : 마태오 복음 25,14-30<또는 25,14-15.19-21>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8454&gomonth=2017-11-19&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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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강론  

http://www.news.va/en/news/pope-francis-homily-for-world-day-of-the-poor

 

2017-11-19 바티칸 라디오

 

(바티칸 라디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성전에서 연중 제33주일이자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다음은 그 때의 교황 강론 영어 공식 번역문이니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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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느님 말씀의 빵을 쪼개어 나누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제 곧 우리는 삶의 여정을 위한 양식, 성체 성사의 빵을 나누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무도 배제되지 않고 우리 모두는 이 양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것, 즉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서 우리 모두는 걸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에 의미를 주고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받기를 간구하며 그분께 우리의 손을 들어 올립니다.

 

복음의 비유는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비유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각자의 능력에 따라”(마태오 복음 25,15) 탈렌트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모든 것에 앞서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탈렌트를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는 재능이 있습니다결론적으로 아무도 그 또는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선택 받았고 축복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어떤 아버지, 어떤 어머니보다 더 우리들을 선물로 가득 채우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에는 어떤 자녀도 소홀히 여겨질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그러하시듯이 사랑하시고 요구하시는 아버지로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일을 주십니다. 비유에서 우리는 종들이 각자 지혜롭게 쓰라는 탈렌트를 받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처음 두 종들은 그들에게 요구되어진 일을 합니다. 세 번째 종은 자신의 탈렌트가 열매 맺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 줍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오 복음 25,25). 그 결과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26)이라고 꾸지람을 받습니다. 무엇이 그를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들었을까요? 약간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여전히 시의 적절한 단어 하나를 쓴다면 나는 그가 태만하다라고 말하겠습니다. 그의 악은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자주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서 우리가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만족하며 쉽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부당한 종과 같이 행동하는 위험에 처합니다. 즉 그는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탈렌트를 낭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그 탈렌트를 조심스럽게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잘못하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도장이 찍히지 않은 티켓을 찾아 내는 검표원이 아닙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자비로운 사랑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 슬픕니다. 그 자녀들은 아버지의 집에 고용된 품팔이들처럼(루카복음 15, 17 참조) 규율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는 것 이상의 일은 하지 않습니다.

 

부당한 종은 그 선물을 나누고 늘리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는 주인으로부터 한 탈렌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켰습니다. 즉 그는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보물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 쓰는 사람은 하느님께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비유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새로운 탈렌트들을 더 벌은 사람이 진실로 성실한 것입니다(21절과 23). 그 사람이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사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멈추어 서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맥락 위에 둡니다. 그 사람은 여러 일들이 있는 그대로 지속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큼은 그가 간과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이익. 그것이 유일하게 정당한 태만입니다.

 

태만은 또한 가난한 이들과 연관이 있는 커다란 죄입니다. 여기에 명확한 이름이 있습니다. 무관심. 우리가 그건 나랑 상관이 없어. 그건 내 일이 아니야. 그건 사회 문제야라고 말할 때가 무관심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와 자매를 외면할 때, 우리가 근심스러운 의문이 들자마자 채널을 돌려 버릴 때, 우리가 악에 대해 분노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무관심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분노를 느꼈냐고, 느꼈지만 우리가 무언가 선한 일을 했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우리가 선물을 줌으로써 우리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싶을 때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의 취향을 알아야 합니다. 선물이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에게 더 기쁜 것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주님께 드리고 싶을 때 우리는 복음에서 그분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구절을 바로 따라간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복음 25,40). 우리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들, 그분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이들은 굶주린 이들이고 병든 이들이고 감옥에 갇힌 이들, 가난한 이들과 버려진 사람들,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고통 받는 이들, 방관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예수님 바로 그분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입술에서 고통에서 일그러져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내 몸이다”(마태오 복음 26,26)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목말라 하시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무관심을 극복할 때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 형제 중에 가장 작으로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 줄 때 우리는 그분께서 진실로 함께 살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선하고 성실한 친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의 제1독서 말씀에 묘사된 훌륭한 아내의 마음가짐을 높게 평가하십니다. “그 훌륭한 아내는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고 합니다. (잠언 31, 10. 20). 여기서 진정한 선함의 힘을 봅니다. 꼭 쥔 주먹과 팔짱 낀 팔이 아니라 그러나 준비된 손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주님의 몸에 손을 뻗을 준비가 된 손에서 우리는 진정한 선량함과 힘을 봅니다.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린토 후서 8,9 참조). 이런 이유로 그들 안에서 그들의 약함 속에서 구원의 힘이 현존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눈으로 그들이 별로 가치가 없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천국으로 가는 여권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부유함으로서 복음적인 의무입니다. 그들에게 빵을 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먼저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빵을 그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돌보는 것이 복음의 의무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물질적인 빈곤의 모든 형태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우리의 삶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즉 하느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 오로지 이것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사랑에 쏟는 것은 남고 그 밖의 것은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지도 모릅니다. “삶에서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나는 어디에 내 것을 쏟아 붓고 있는가?” 부유함을 쫓으면서 세상이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부유함에 쏟아 붓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부유함에  쏟아 붓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 버릴 것인가. 하늘 나라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복음 12, 21)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추구하지 맙시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추구합시다. 그리고 가치 있는 어떤 일도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도움이 필요한 것에 대해 연민을 갖고 계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탈렌트들을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찾을 지혜를 주시고 그리고 말이 아닌 행동 안에서. 사랑하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바티칸 라디오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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