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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1.3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30 조회수2,221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7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로마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 마태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어떤 사람이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색을

갖기 위해 바닷가에 누워서

선탠(Suntan)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햇빛이

너무 눈부시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손을

올리고 잠든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의 예상처럼

이 사람은 이상한 모양의

선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손가락 모양이

남겨진 것이었지요.
여기서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피부를 그을리게

만든 태양에게 잘못이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손을 올리고 잠든 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태양에게

잘못을 묻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묻는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대해

하느님께 원망을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앞서서

하느님 아버지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먼저 헤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생각을 넘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뛰어넘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야 말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매 순간 감사함을

체험하면서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맞춰서 복음은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는 잘 알다시피

어부였습니다.

그의 형 베드로와 함께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을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 부름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부르심에

곧바로 따른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요?

바로 평소에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아무런 이유나 핑계 없이

곧바로 따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도들처럼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매순간의 삶이

기적임을 체험하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방치된 정원에 잡초가 자라듯

노력하지 않는 사랑은 어느새

다른 감정들에 의해 가려진다.

(앙드레 모로아)

성 안드레아 사도.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좋은 글’ 중에서)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다면 

 이젠 그 두 손을 활짝 펴십시오.

가진 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나누어 주십시오.

이는 두 손을 가진 최소한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두 눈이 꼭 나만을 위해

보았다면 이젠 그 두 눈으로

남도 보십시오.

보는 것이 비록 좁다 할지라도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을 본다면

찾아가서 도움을 주십시오.

이는 두 눈을 가지고 해야 할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두 귀로 꼭 달콤함만 들었다면

이젠 그 두 귀를 활짝 여십시오.

듣는 것이 비록 싫은 소리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들어주며 위로 하여 주십시오

이는 두 귀를 가지고 함께 할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늘 불평만 하였다면

이젠 그 입으로 감사 하십시오.

받는 것이 비록 작다 해도

그것을 감사하는 사람과 손잡고

웃으면서 고마워하십시오.

이는 고운 입 가지고 살아 갈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꼭 닫으면서 살았다면

이젠 그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마음 씀이 비록 크지 않더라도

그것을 주변의 사람을 향하여

미소로써 대하며 사십시오.

이는 내가 사랑을 받고

나눠야 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연다면 어떨까요?

 삶 전체가 기적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끼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배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막달라 성당의 제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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