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를 깨어있게 해 주는 ‘주어진 길’
작성자김리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03 조회수2,270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7년 나해 대림 제1주일


<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복음: 마르코 13,33-37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1661)

 


주일 아침마다 은하철도 999’를 보다가 어린이 미사에 늦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철이라는 꼬마아이가 메텔이라는 엄마를 닮은 예쁜 여인의 도움으로 은하철도 999를 타고 우주를 돌아다니며 많은 모험을 겪는다는 것뿐입니다. 그 아이가 왜 기차를 타려했는지 또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시작과 결말을 찾아보니 충격적이었습니다. 때는 서기 2221, 열차로 우주여행을 즐기고 몸을 기계로 바꾸어 영생을 누리게 된 시대입니다. 그런데 몸을 기계로 바꾸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사람으로 살다가 죽게 됩니다. 철이와 엄마는 빈민촌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인데 은하철도 999를 타면 공짜로 몸을 기계로 바꾸어준다는 메갈로폴리스로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습니다.

그러나 철이라도 기계로 만들기 위해 기차를 타려는 순간 인간사냥이 취미인 기계 백작의 손에 엄마가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사실 기계 백작은 프로메슘의 사주를 받아 그런 일을 한 것이었는데 메갈로폴리스의 여왕인 프로메슘이 철이를 기차에 태우고 메갈로폴리스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프로메슘이 엄마를 닮은 메텔을 만들어 철이를 데려오게 한 것입니다. 프로메슘의 남편이 철이의 어머니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질투하여 철이 어머니를 죽이고 철이까지 기계로 만들어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메갈로폴리스에 와서 본 기계인간들의 삶은 처참했습니다. 영원히 살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그저 흥청망청 살아가지만 그것도 재미가 없어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 자기 몸을 부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철이는 이 세상에서 영원성을 갖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껴 기계가 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죽인 기계 백작을 죽이고 프로메슘 때문에 기계가 되어 이용당하고 있었던 메텔과 힘을 합쳐 프로메슘을 쳐 이기고 기계인간을 찍어내는 별을 파괴하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살거나 영생을 누리기 위해 노력을 하였습니까? 그러나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성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가라앉는 배에 탄 사람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만 무한하게 된다고 유한한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 짧으니까 무언가 목적을 세우고 열심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미는 죽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인생의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철이가 자신이 그 오랜 기간 메갈로폴리스에 도착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은 결국 그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진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기차에서 내리게 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성경에서는 잠자고 있다고 말합니다.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어있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깨어있다면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전철을 잘못 탔다면 전철 지도를 알아야 자신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치 철이가 깨닫게 된 것처럼 진리가 내 안에 들어와야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진리가 바로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이 깨어있도록 하는 유일한 진실이시고 진리이십니다.

 

며칠 전에 찜질방에 갔습니다. 어두운 곳에 앉아있다 일어나 나가려던 순간 앉아있던 자리에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흘려놨는지 바지와 발에 묻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인상이 찌부러지며 들고 있던 수건으로 발과 반바지를 닦았습니다. 그러며 밖으로 나오는데 저거 네가 닦아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수건은 찜질방 빨래통에 넣으면 그만인데도 그 목소리를 뒤로하고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다른 곳에 앉아있으면서도 내내 신경이 쓰여 다시 갔지만 누가 닦은 뒤였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삶이 참 생명으로 가는 진리의 길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합니다. 정상적이라면 매 순간 양심이 그 법을 알려주며 잘못된 길을 가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여 빨간불이 들어오게 합니다. 깨어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듯 빛이 들어와야 어둠에 있다가 깨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일이 매 순간 일어나기에 매 순간 깨어있기 위해서는 매 순간 길이요 진리요 생명자체이신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깨어있게 만드는 진리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깨어 있음이란 주인이 종에게 맡기고 간 소명을 항상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잠을 자는 상태는 다른 것에 빠져 그분의 맡겨진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처럼 살라는 소명입니다. 당신이 진리이고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벗어나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매순간 깨어있음이란 바로 매순간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에 일치하느냐를 보며 그분의 주파수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함을 의미합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물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을 더 믿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둠 속에서 잠만 자게 되는 이유는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더 믿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그분께 손을 내밀어야합니다. 그러면 다시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매 순간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는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과 함께 있음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잊어야합니다. 아마 물 위를 걸을 때 베드로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고 그렇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매 순간 자신에게 오는 그 힘에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깨어있다면 이렇듯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매 순간이 평화와 기쁨과 감사가 솟아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도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처럼 하라고 하십니다. 돈키호테가 기사 소설을 많이 읽어서 본인이 기사가 되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돈키호테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이 읽은 기사소설의 주인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풍차와 싸우고 술집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그 주어진 길에 기뻐합니다. 술집여자가 왜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냐며 돈키호테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꿈은 주어진 길입니다. 꿈은 내가 꾸고 싶어 꾸는 것이 하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향해 꾸시는 꿈입니다. 그 꿈은 나에겐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어진 길입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잠을 자는 것입니다. 돈키호테는 그 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 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 할 때까지 가야해

저 별을 향하여!

 

이렇게 고통과 환난 중에서도 기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희망에 가들찰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올바른 기차, 주어진 길을 잘 가고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런 종이 깨어있는 종입니다.

 

요즘 낙태죄 폐지로 시끄럽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여성의 인권과 선택권을 보장하라는 이유입니다. 여성을 산아제한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권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인간이 될 수 있는 아기의 인권을 처음부터 짓밟으며 나의 인권만을 주장하는 것은 양심상 용인될 수 없습니다. 양심에 빨간불이 들어와도 모른다면 시대적으로 나라 전체가 잠으로 빠져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에 어긋나면 다시 온 국민이 촛불을 들 수 있어야 깨어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란 사랑의 길입니다. 정의의 길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주어야 합니다. 사랑만 생각하는 삶이 깨어있음입니다. 이미 잉태되어 자라고 있는 새 생명을 죽이는 것이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잉태했다면 그 아버지와 함께 공동 책임을 지게 하는 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주의가 만연해지면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도 마음 안에서 울리는 빨간 불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치 처음에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철이에게 누군가가 기계가 되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어도 소용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 안에는 깨어있지 못하게 하는 이기적인 어둠의 법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법을 선택하느냐가 바로 깨어있거나 잠자거나 하는 선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주어지면 내 안에서는 어둠의 법과 싸우게 되는데 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깨어나기 직전이 됩니다. 일어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하게 될 때가 바로 깨어나기 직전인 것과 같습니다. 돈키호테처럼 자신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깨어나면 잠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에 다시 깨어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당신 삶의 법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방법이란 나에게 주어진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직시하는 것이고 그 주어진 길이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깨어있게 하실 수 있는 참 빛이시고 구원이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