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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실패할수록 광야에 가까워진다
작성자김리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09 조회수2,623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7년 나해 대림 제2주일


<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복음: 마르코 1,1-8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저는 대학에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학점이 1.7점이었죠. 여러분은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미용실에 앉아있었어요. 그리고 거울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뒤에, 한 여자가 머리를 말리고 있더군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 때마다, 저를 보더라고요. 눈을 보면서... 저는 그녀를 처음 보았어요. 그녀는 펜을 달라고 하며 예언이 떠올랐어요.’ 1975327, 그녀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하지만 저는 얼마 전 퇴학을 당했다고요. 저는 육군 입대를 알아보고 있었어요.’ ... 그리고 실제로 저는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수백만 명에게 이야기를 전했죠.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중요했던 건 그녀가 한 말이 항상 제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보호받았고 길을 배웠고 변화했습니다. 실패하세요, 크게! ... 안전한 상자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크게 실패할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는 미국 최고의 배우 덴젤 워싱턴이 어떤 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퇴학을 맞지 않았다면 그 청년은 미용실에서 자신에게 한 그 여인의 말을 그렇게 끈기 있게 붙잡고 믿으려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성공해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저 웃어넘길 허무맹랑한 말 따위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날짜까지 명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런 목소리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그렇게 하느님만 절실하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 아직 세상에 의지할 것이 남아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그 사람 안에서 싹도 틔우지 못하고 시들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하는 이유는 바로 그 광야에서만 주님의 목소리가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신의 힘을 빼지 않은 사람은 마치 고집 센 망아지처럼 주인의 힘이 자신을 통해 작용할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힘을 빼는 과정은 이 세상에서 실패의 광야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중국 1위 갑부인 마윈 알리바바의 홍콩대 졸업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실패에 대한 경험을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실패를 많이 했죠. ... 저는 재미있는실패들을 했었습니다. 중요한 초등학교 시험에 두 번 낙제했고요. 중학교 시험에도 세 번 낙제했죠. 그리고 대학도 삼수를 했죠. 그리고 취업을 준비했는데 30번 떨어졌습니다. 동네에 처음 KFC가 들어왔을 때 24명이 응시했고 23명이 합격했는데 나머지 1명이 바로 저였습니다. 경찰에 지원했을 때는 5명 중에 4명이 붙었습니다. 역시 저는 나머지 1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거절당하는 일은 ... (일상이었죠). , 그런데 제가 하버드에도 지원했다고 했죠? 10번 다 거절당했습니다. 이 실패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린 그렇게 잘나지 않았거든요.’ 지금도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거절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죽을 맛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포레스트 검프란 영화를 추천해줬죠.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바로 이 남자다, 우리가 배워야 할’. 당신이 하는 일을 믿으세요. 그 일을 사랑하세요. 다른 사람이 좋아하든 말든. ‘단순하게요’.”

 

여기에서 우리는 마윈이 가난하게 태어나 어떻게 중국의 제1의 갑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실패를 남의 탓이라 돌리지 않았습니다. 잘나지 않은 자신의 탓이라 여겼습니다.

우린 그렇게 잘나지 않았거든요.”

자신이 잘났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해보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뛸 수 있는 높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높이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평온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탑니다. 겸손해지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몸에 힘이 빠진 사람입니다. 광야에 나오지 않고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힘을 주실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생각 좀 그만 하고 힘을 빼고 주님께 맡기는 삶을 연습해봅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힘을 빼고 모든 것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분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카톡으로 이런 내용이 저에게 와서 소개합니다. 개신교 목사님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 과정이 우리 모두가 신앙체험을 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글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청주 사도교회를 담임하셨던 차재용 목사님이 초년에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아무리 애를 써도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교인들은 변화도 없고, 목회가 너무 어려워서 좌절감으로 얼마나 갈등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설교를 하는데 안면근육에 마비가 와서 교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얼굴이 틀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설교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내려와서 그 길로 기도원에 올라가셨습니다.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말이 금식기도지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나님, 저를 목사로 세우시고 이 꼴이 뭡니까? 목회는 안 되고 설교는 저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고.’

나흘째 되던 목요일 밤에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 들으셨다고 합니다.

귀 뚫린 종아! 귀 뚫린 종아! 귀 뚫린 종아!’

목사님이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출애굽기 212절에서 6절에 귀 뚫린 종에 관한 규정이 나와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돈이 없어서 남의 집 종으로 팔리면 6년 동안은 종으로 살지만 7년째에는 자유인이 되어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완전한 종으로 영원히 살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계속 종이 되기를 원하면 주인이 그를 재판장에게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에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그 귀를 뚫으면 그가 영원히 그 주인을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귀 뚫린 종이 되면 세 가지 단점이 있는데 하나는 귀를 뚫을 때 너무 고통스러운 것, 어디를 가도 종이라는 표시가 나는 것, 더 좋은 곳이 있어도 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반면 장점도 있는데 첫째, 노예 상인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이미 주인이 있으니 어디 가서 이 사람을 노예로 팔 수도 없지요.

둘째, 주인이 열쇠를 맡깁니다. 귀 뚫린 종은 이제 어디로 떠나지 않으니 주인이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것이지요.

셋째, 주인과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주인과 한 가족이 됐기 때문입니다.

차재용 목사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귀 뚫린 종으로 받으셨다는 사실이 정말 마음에 믿어져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새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목회의 스트레스, 개인적인 열등감, 그런 것들이 다 사라져서 정말 주님께 다 맡기며 평생 목회를 잘하실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 나와야만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보통 때는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자신의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는 하늘을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닥쳐오는 실패 속에서도 평온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 포기해서 나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잔잔한 상태가 되어야만 하늘을 담을 호수가 됩니다.

우리 모두도 귀 뚫린 종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형식적으로만 그렇게 실제로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합니다. 아직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실패는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 겸손하게 합니다. 그때서야 참으로 귀가 뚫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멍에를 즐겁게 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됩니다. 물 위를 걷게 됩니다. 이곳까지 이끌려고 했던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걷고 싶다면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자신을 그만 믿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오로지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 그러면 주님을 보지 못해도 물 위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주님을 의심할 수 없이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찬미하게 됩니다. 광야는 내일을 알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없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더 좋습니다. 주님과 더 가까운 광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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