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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2.1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10 조회수1,988 추천수4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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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일

제1독서 이사 40,1-5.9-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제2독서 2베드 3,8-14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

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복음 마르 1,1-8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있었는데,

제가 선택한 곳은 산악반이었습니다.

 산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감,

산이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경치는

 일상 삶 안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여기에 보너스로 건강한 몸도

갖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험한 산,

 오르기 힘든 산을 가는 것도

너무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신병교육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을 때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워낙 좋아했던 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때 오르는

산은 정말로 괴로웠습니다.

산에 빨리 오르지 않으면 알아서

 하라는 조교들의 험악한 말을

들으면서 어쩔 수없이

강압적으로 오르게 된

산이었기 때문이지요.
똑같이 오르는 산이지만

 이러한 차이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르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내가 선택한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하는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어쩌면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무조건 괴롭고 힘든 고통과

시련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기쁨과 행복의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행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 삶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 있는 행동은

바로 생각의 전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주님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요.

 그래서 광야에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끔 했습니다.

그리고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삽니다.

(마르 1,6 참조).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인간의 욕망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이 이런 선택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사제직에

있었던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이는 그가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살 수 있는

 집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 선택을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사명에 충실한 것이

 바로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하려고

 하지 않고, 또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서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는 자신이

주님보다는 결코 높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세례자 요한의 이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참으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해 달라,

저것도 해 달라고 합니다.

마치 맡겨놓은 것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잘 생각해보면 주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종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주님보다 절대로

높아질 수 없는데,

온갖 불평불만 속에서

주님 탓을 외치면서 마치

종을 대하듯

 했던 것이 아닐까요?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리고 주님을 진정으로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2베드 3,13 참조)

내 몸이 귀하다고 하여

남을 천히 하지 말고,

자기가 크다고 하여

남의 작은 것을

업신여기지 말고,

자기의 용기를 믿고서

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명심보감

1990년 인천교구 신학생

북한산 야유회 때

"나이 듦에 대해..."

어떤 모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요.”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 시간의

흐름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과연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서 언어학자들은

“그렇지 않다.”라

고 말한다고 합니다.
언어학자들은 조사를 해보니

교육받은 4~50대가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떠올리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도서관이

젊은이들의 것보다

더 방대하기 때문이지요.

도서관이 크면 클수록 책을

찾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결국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찾는데

오래 걸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나이 듦이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오래된 도서관이 그리고 많은

도서를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이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 역시 나이 듦이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더욱 더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분들이십니다.
자꾸 잊어버린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격하하지 마십시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니까요.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잘 준비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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