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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2.2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23 조회수3,031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7년 12월 23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말라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복음 루카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어렸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

하루 종일 고민하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나 미운 아이가 있었는데

마침 저 앞에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글쎄 이 돌에 맞았는지

그냥 쓰러진 것입니다.

너무 무서워서 그냥 도망쳤습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밤새 돌이킬 수

없는 저의 행동에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잠도 못 자고

밤새 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 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멀쩡한(?) 모습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친구에게 “너 혹시

어제 돌에 맞지 않았어?”라고

조심히 물었지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돌에 맞은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해보니 제가 돌을

 던진 순간 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이었습니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론을 맺고 혼자서

끙끙 앓았던 것이었지요.
이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면 내 자신이 더 아프고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어떤 실수나 잘못된 판단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어떤 책에서 실수나 잘못된

판단을 통해서 ‘본연의 나’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즉, ‘본연의 나’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는

자신과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다면서 하느님의

일에 대한 의심을 품지요.

그 결과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한 커다란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수의 결과는

계속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때에

이름을 짓는 명명식을 하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적으면서 하느님께

대한 순명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했던 실수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의심하고 또 불순종의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틀려먹었어. 이 죄인이

어떻게 감히 용서받을 수 있겠어?’

등의 생각들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금

당장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겠는

행동을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나는 추운 겨울이

제일 싫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사계절

중에서 겨울이 네 번째로 좋아.”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큼 일상의 삶 안에서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자신의 실수에 부정적인

생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 더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순간임을 깨닫고,

지금 당장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후회하지 말아라.

스티븐 호킹)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곳.

"감사의 이유"

제가 아는 신부님은

기억력이 대단합니다.

히 사람에 대한 기억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년 **월 **일, **에서

신부님과 제가

이런 일을 같이 했었어요.”

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저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도 말이지요.

그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모습에

“와, 정말로 대단하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부럽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기억하면 나쁜 일들도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지요.

좋은 것만 선별해서 기억하는

 능력은 없는 것 같더군요.
이러한 측면에서 기억력이

나쁜 것 역시 은총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는 ‘머리가

참 좋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지만, 잊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그만큼 힘든 삶을 사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것은 기억하고

나쁜 것은 잊어버릴 수 없다면,

다 잊어버리는 것이

 다 기억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닐까요?

머리 나쁜 것도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해변가에 누워서 아름다운

사이판을 눈에 담았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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