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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땅나 51 【참행복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12처 2
작성자박미라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24 조회수1,383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늘땅나51] 【참행복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12처 2

<실생활>
1984년 3월 2일. 소임이 바뀌는 날! 다른 수녀원에 있는 5촌 아주머니 수녀님이 면회를 왔는데,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기를 원하나 비애 없이 고통을 당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애 중에 고통을 당하셨다.”는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적어 코팅을 해서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고서 저는 곧 ‘이제부터 내가 당할 고통은 비애 중에 받는 고통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네, 주님! 저도 당신처럼 비애 중에 고통당하게 하여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는데, 새로 받은 소임은 ‘이제 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엄마소임’이 아니라 ‘병원 소임’이었습니다. 병원 방면으로는 전혀 문외한이라 병원에 첫 출근을 하고는 ‘이게 죽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교황님께서 방문하셨던 날인 5월 4일 저는 법정 전염병(그해 간염이 법정 전염병으로 반포되어 먼저 병원사람들부터 검사를 시작함)인 B형 간염으로 판명되어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이것이 죽는 것인가?’ 하였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2개월 후 ‘이쯤 되었으면 살아날 때가 되었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저를 아끼던 어떤 동료가 “자기 죽으려면 아직도 멀었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 “나 벌써 죽었는데?” 하고 반문했지만 무언가가 석연치 않아 성당으로 올라가 12처를 바라보고 ‘정말 내가 예수님처럼 죽으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곧 그 동료는 소임이 바뀌어 멀리 떠나게 되었고, 저는 환자라는 명목으로 ‘쉬는 소임’을 받았는데, 그것은 제 본래 소임보다도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남보다 30분 더 일찍 일어나서 다른 곳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미사에 참례해야 하고, 세 끼 식사를 다 다른 곳에서 왔다 갔다 하며 해야 하고, 하루 종일 재봉틀에 앉아 일을 해야 했고, 점심시간도 30분줄이고, 저녁 때 일을 끝내는 시간도 남보다 30분을 더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언제든지 피곤하면 쉬어도 좋다.”고 한 분이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시간을 다시 체크해서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는 그 지시를 일분일초도 어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마침내는 두 달 후에는 주어진 모든 일을 기쁘게, 아주 기쁘게 마음속까지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저를 그렇게 취급하는 분까지도 기꺼이 받아주고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때 제가 온전히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말씀은 『준주성범』145쪽(1996년. 가톨릭출판사) ‘평화를 얻는데 필요한 네 가지 주의’였습니다.

“아들아, 이제 평화와 참된 자유의 길을 가르쳐 주겠다.
네 뜻을 따르는 것보다, 남의 뜻 받들기를 힘써라.
항상 많이 가지는 것보다 적게 가지기를 원하라.
항상 낮은 자리를 취하고,
모든 이에게 복종하기를 도모하라.
항상 하느님의 성의가 완전히 네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라.
이런 사람은 평화와 안정의 경계 안에 들어가리라.”
(= “죽게 되리라” = “영원히 살리라”)

7월 29일 “네가 오로지 원할 것은 사나 죽으나 하느님께서 항상 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할 것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든 이의 수하에 겸손되이 너를 낮추어라. 누가 이런 말을 하고, 누가 이런 것을 명했는가 캐지 마라. 누가 네게 어떠한 것을 하라고 하였거나 하기를 바라는 듯 하거든 그가 어른이거나 아랫사람이거나 동무거나 상관할 것 없이 다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성의껏 그 뜻을 채우려고만 많이 힘써라.”(준주성범)

열심히 노력한 결과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마음으로부터 기쁘게 받아들여 날아갈 듯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육신은 너무 과로하였기에 검사 결과가 더 나빠져서 9월에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한 후로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남은 애착심을 버리는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때까지 만난 모든 사람, ‘그 안에서 주어진 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온 길인데 어처구니없게도 거기에서도 또 많은 것을 “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었던 동료들”, “십자가의 길 내내 저를 도와주었던 고해 사제”, “제일 마지막으로 저에게 주어졌던 소임”에 대한 애착을 끊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 모든 애착심을 하나라도 끊지 못한다면 어떻게 온전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소임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는 저를 보고 오라버니는 9월에 “결실의 계절, 산들이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는 이때에 오랜만에 보내 준 네 편지 고맙고 기쁘게 받아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병상에서 지내느라고 고생한 네 글을 읽고 마음이 무척 아팠단다.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잘 견디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주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어서 빨리 쾌차하여 다시 주님의 포도원에서 보람된 나날을 보낼 날이 오기를 주님께 기도드린다.... 한 가지 잔소리 비슷한말을 한다면 물론 집에 할 일이 많이 있어서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왕지사 병상에 있는 처지에서 그런 것을 자꾸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주님께서 다시 건강을 되돌려주신 후에 또 못 다한 일을 하면 되는 것이나, 지금은 너무 잡다한 일에 신경을 쓰지 말고, 무엇보다 먼저 건강 회복에만 전념해 주기 바란다. 지나간 시간이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느라고 지금 당장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처해 있는 처지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지난날에 너무 매달려서 자꾸 되뇌는 것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니 지금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하기 바란다.
그러고 보니 또 직업의식이 발동한 모양이지? 미안!...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지. ‘세상에 필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즉 내가 아니면 그 일을 아무도 못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 이런 생각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우쳐주는 말이겠지. 공연히 할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신경 쓰지 말고, 네 자신을 반성하고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건강 회복에 더욱 힘쓰기 바라며, 혹시 내가 뭐라도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알려주기 바란다. 내 힘껏 도와 줄 테니 말이다.” 라고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지막 남은 일에 대한 애착심’을 끊고 온전히 죽을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일에 대한 애착심’은 ‘저의 껍질 속에 마지막 남아 있던 힘’이었습니다. 이제 겉껍질도 다 썩어 없어졌고, 씨눈을 감싸고 있던 속껍질도 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그 순간에 완전히 썩었습니다. 이제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에서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이제 제게 대하여 죽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끈질기고 악착같이 저를 내신 아버지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던 세상과의 싸움을 끝내고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ㄷ) 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님처럼 저도 당당히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덤 속에 들어가 썩은 속껍질을 벗어버리고 씨눈을 틔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곧 “부활”하는 것이지요. 이제는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고, 한없는 고요와 평화 속에 머물며 다만 기다리면 됩니다. 희망을 가지고 기쁨과 영광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이러한 마음의 깊은 평화를 맛 본 순간은 결코 없었습니다. 이 순간에 느끼는 평화는 아무도 건드릴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고요와 깊은 평화”를 1984년 10월 1일로부터 12월 14일(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에 십자가에서 내려 어머니 품에 안기는 그 순간까지 75일 동안 너무나도 풍족하게 맛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의 그 어떤 조건도 부러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겁날 것도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해칠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기에 다만 행복할 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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