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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2.2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25 조회수2,832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7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제1독서 이사 52,7-10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제2독서 히브 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복음 요한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사람들이 종종 제게

영양제를 선물로 주십니다.

건강하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잘 전달하라는 이유겠지요.

그런데 워낙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리고

 여기에 저의 게으름이

더해지면서 주신 영양제를

좀처럼 먹지 않게 됩니다.

옆에서 일일이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영양제의

숫자만 늘어납니다.
며칠 전, 우연히 영양제 병

겉면에 붙어 있는 유통기한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기간까지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깝기도 하고 또 이를

주신 분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루에 한 알씩 복용하라고

하는 이 영양제를 하루에

한 움큼씩 먹었을까요?

 아니면 시간이 날 때마다

영양제를 복용했을까요?

그러고도 싶었지만 이렇게

했다가는 영양제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우선 열심히 빠짐없이

먹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찾아오시는

신부님들에게 이 영양제가

너무나 좋다면서 억지로

 먹이기도 했습니다.
이 유통기한을 보면서

우리 역시 유통기한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한대의 유통기한이 아닌

언젠가는 이 세상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날과

그때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통기한에 맞춰서 약을

복용하는 것처럼,

나의 유통기한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통기한에 다다르게 되면,

내 자신을 만들고 이 땅에

보내신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게

되었습니다(요한 1,14 참조)

그런데 주님의 성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단순히 매년 맞이하는

하나의 커다란 행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탄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커다란 사랑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모든 민족이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사 52,10 참조)

그런데 전지전능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시자마자 근엄하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니면 놀라운 기적을

베풀면서 하느님의 힘을

 세상에 보였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인간과 완전하게 함께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럴 수가 없지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이 어린 아이와 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른들이 노는 방식으로 놀면

아이가 즐거워할까요?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쓰는

언어와 행동을 해야지만

아이와 즐겁게 놀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점잖으신 백발의

할아버지께서 어린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우스꽝스러운 행동도

거침없이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를 낮춰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고 주님의

사랑만을 받으면서

살아야할까요?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삶의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에,

즉 마지막 심판 때를 떠올리면서

 주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임박해서

한꺼번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이렇게

보여주신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삶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통해서 유통기한이 다해

주님 앞에 가게 될 때,

분명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4)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예물은 없다.

빈센트 반 고흐)

이스라엘 베들레헴의 성탄구유

"화를 다스리는 법"

(정균승, ‘내가 나로 살아갈 자유’ 중에서)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

화난 마음을 속으로

삭이는 대신, 걷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치유하는 것. 하염없이

 걷다 보면 화가 풀린다.

그러면 그 자리에 나만

알 수 있게

막대기로 표시해 둔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왜 그토록 화났는지

이유를 돌이켜 본다.

 화난 이유를 알면

마음은 평정을 되찾는다.

이것이 에스키모인들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살다 보면 또 화가 치미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에스키모인들은

 다시 길을 나선다.

노여운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무작정 걷는다.

그렇게 걷다가 예전에 꽂아 둔

막대기를 발견하면 그걸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진단한다.
‘아, 지금 내 마음이 예전보다

힘들어하는 구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면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다시 걷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분노했는지

되돌아보면서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걸어도

 막대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아, 내 마음이 전보다

견딜 만한가 보구나!’

하고 삶에 고마워한다.
이렇듯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났을 때 싸우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화를 다스린다.

화가 치민 현상보다

왜 화가 났는지

본질을 보려는 거다.
에스키모인들의 화를 다스리는 방법,

한 번 사용해 볼 만 하지 않을까요?

갑곶성지의 성탄구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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