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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2017년 12월 31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29 조회수1,620 추천수3 반대(0) 신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20171231.

루가 2, 22-40,

 

오늘은 성가정(聖家庭)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유럽과 미국에 현대 산업사회(産業社會)가 출현하면서 과거의 농경(農耕)사회와는 다른 현상이 일어납니다. 산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없었던 일입니다. 가족이 사회의 기본이라는 생각도 점점 희석되고, 개인이 더 소중하게 보이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생명과 사랑의 온상인 가정의 전통적 가치가 훼손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 교회는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喚起)하기 위해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과 섬김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으로 들은 말씀은루가복음서2장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신 다음, 그분이 인류를 위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공동체가 그분의 기원(起源)에 대해 말하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루가복음서1-2장과마태오복음서1-2장이 말하는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모든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초기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믿고 있던 바를 각색(脚色)하여 역사적 이야기로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들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아들을 성전(聖殿)에 봉헌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농산물(農産物)의 첫 수확, 축산물(畜産物)의 맏배, 그리고 자녀들 중 맏아들을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성전에 봉헌하면, 하느님이 그것을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그것들이 필요해서 사람이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봉헌하면, 하느님의 시선이 봉헌물 위에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생산한 것을 그 시선, 곧 하느님의 시선으로 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고, 우리의 욕심 따라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하느님의 의도대로 처리하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봉헌(奉獻)의례(儀禮)입니다. 농산물의 맏물, 목축(牧畜)에서 얻은 맏배, 가정에 태어나는 맏아들을 봉헌하면서, 이스라엘은 이제부터 생산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시선 따라 처리하겠다고 마음다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시므온에게 성령이 머물러 계셨고’, ‘성령이 그에게 알려 주셨고’,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루가복음서의 집필자는 모든 중요한 일의 시작에 성령의 일하심을 봅니다. 예수님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1,35), 예수님의 공생활도 성령의 인도로 시작되었습니다(4,14).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것도 성령강림(사도 2,1-4)이 있은 후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마련하신 구원, 모든 민족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구원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에 그리스도 신앙이 있습니다.

 

인간은 불안합니다. 세상에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있고, 병고를 비롯한 예기치 못한 불행들이 있습니다. 역사 안에 발생한 민속종교들은 이 두려움에 대한 대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해악(害惡)을 피하고 신()의 가호(加護)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에 가면 산신(山神), 바다에 가면 용왕(龍王), 동네에 있는 고목(古木)에는 목신(木神)을 생각하고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한 가슴을 안고 신()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산신, 용왕, 목신, 이런 신들에게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면서 재앙을 피하고 행운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동네의 성황당(城隍堂)도 그런 행운을 비는 곳이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이라 말하면서 인간에게 죄의식을 고취하고, 불안한 마음을 자극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아 구원받으라고 말한다면, 신앙을 민속(民俗) 종교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속 종교들이 이미 권하고 약속한 바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소.”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읽어냅니다. 그 은혜로우심에 입각하여 자기 주변을 새로운 시선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빼앗고, 비방하고, 이기고, 지배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려 합니다. 진화(進化)과정에서 자신이 살아남고 또 종족(種族)을 유지하기 위해 습득한 동물적 본능의 잔재(殘滓)라고 할 것입니다. ‘털 없는 원숭이로 인간을 분류한 동물학자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배경으로 더 많이 가지고, 더 강하고, 더 지배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진화과정에서 얻은 동물적 본능을 하느님의 힘을 빌려 실현하겠다는 착각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모든 민족들 앞에 하느님이 마련하신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보면서 은혜로우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입니다.”(마르 8,34-35). 자기 한 사람 잘 되어보자고 사는 인생도 아니고, 자기 한 목숨 소중히 아껴서 구원에 이르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인간 생명에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과 보살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보살핌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성가정(聖家庭) 축일은 가정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자는 날입니다. 가정은 인간 생명이 은혜롭게 태어나서 삶을 배우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므온의 말과 같이 하느님이 베푸신 구원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 그분의 자녀로 살라고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자유롭게 마음껏 펼치며 살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가정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이 인간의 몸에 스며들게 하는 요람입니다. 성가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섬기러 오셨다.”는 예수님, “서로 사랑하여 내 제자 됨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예수님을 키워낸 가정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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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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