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그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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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8-01-02 | 조회수1,34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바리사이들이 보낸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죠?” 그러자 요한이 답하였다. “나는 물로 준다. 그런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계신다. 내 뒤에 오시지만, 나는 그분 신발 끈을 풀어 드리지도 못한다.” 이는 그가 머문 요르단 강가에서 일어난 일이다(요한 1,24-28 참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로 추앙받는 걸 거부했다. 그는 주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울리는 소리’에 불과하단다. 심지어 그분 신발 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나. 암튼 누구나 인기를 한 몸에 받다 보면 자신에게 착각하기가. 그러나 그는 이렇게 자신만의 성찰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흔히 샛별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별로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은 그 이름도 새벽별이라나. 그러나 그 반대일 수가. 그것은 가장 먼저 뜨는 게 아니라 가장 나중까지 남는 것도 되니까. 그 별이 하나둘 사라지는 그 밤하늘을 끝까지 지키다가, 마침내 붉은 해에게 건네고 스스로 사라진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은 6월 24일이다. 때는 가장 긴 낮이 짧아지는 그 참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긴긴밤 동지에서 낮이 점점 길 때이다. 이처럼 요한의 삶도 그의 탄생시기가 갖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그분 오시는 그 길 앞서 닦고는 자신은 점점 작아졌다. 많은 이가 따랐기에 스스로를 내세울 욕망이 일만도 한데, 끝내 그 모든 영광 뒤로한 채 그분께만 드렸다. 심지어 자신은 사람으로는 가장 낮은 마지막 끝자락에도 미치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한, 이보다 더한 ‘겸손’이 또 어디에 있을까?
사실 당대의 모든 이는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며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할지언정. 정녕 그는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서 단지 그분 오심을 준비하는 이라고만 선언을 했다. 세례를 베푸는 것도 그분을 맞이하는 준비란다. 이렇게 그는 지극히 겸손하였다. 그러기에 그분 신발 끈을 감히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진솔한 고백을 마다하지 않았다. 올 새해를 맞이하여서도 우리 모두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의 정신으로, 오로지 하느님 영광만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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