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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1.0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03 조회수2,034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제1독서 1요한 2,29-3,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복음 요한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

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인터넷에 화제가 된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글쎄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상태인데,

운전수로 보이는 사람이

풀밭에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교통사고가 나면 대부분이

망연자실합니다.

만약 상대가 있다면 삿대질이나

 실랑이를 벌이게 되지요.

런데 이 사람은 별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나 봅니다.
이렇게 낙천적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행복한 것 같고,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주위에 있는

가족이나 동료들은 그 모습에

답답해하면서 속이

터진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반대로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 주변 사람들은

조금 편할 수 있습니다.

알아서 그 모든 것을

하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너무나 세심하고

꼼꼼해서 피곤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이 필요한 것일까요?

적당하게 낙천적이고,

적당하게 꼼꼼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적당한 것은 과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이 아닌 다음에야

그 적당함을 정확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조금 더 쉽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인상 깊은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께서

횡단보도를 건너가십니다.

 빠르게 걷지 못하자,

한 아주머니께서

“할아버지,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고 하면서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십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한 아가씨가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걷습니다.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서

그냥 걸어갈 뿐입니다.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넌

할아버지는 이 아가씨를 향해

진심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고마워요.”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이 아가씨가 한 것은

그냥 걸었을 뿐이지만,

 할아버지는 함께 걸어가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감사함을 느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면서

살아가면 어떨까요?

 그런데 주님께 대해서는

어떤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올림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도 섰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주님을

드러내고 증언을 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아드님’

이라고 증언하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 기쁨과 행복의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사이사이

기쁨의 순간들이 있었다.

하나의 기쁨이 있어

아홉쯤의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

(정연복)

이렇게 웃으며 함께 합시다.

"엿"

‘엿’이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통적인 우리나라

국민의 간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아주 어렸을 때,

고물을 팔아서 엿으로

바꿔먹던 기억이 나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엿’이

욕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소위 ‘엿 먹어라!’라는 표현으로,

이 말을 듣고서 환하게 웃으면서

“우와 맛있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이 욕의 의미로

변한 것은 1964년 12월 7일에

있었던 서울 중학교 입시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과목 18번 문제가 “엿을

만들기 위해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을 고르라.”

라는 것이었고,

1) 디아스타제,

 2) 꿀, 3) 녹말, 4) 무즙

이 보기로 제시되었습니다.

 출제 측에서 요구했던 정답은

 1번 디아스타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합격한 학생의

부모들이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서 문교부와

시교육청을 찾아가 던지면서

이렇게 말하면서

항의했다고 하지요.
“엿 먹어보라!!”
분명히 좋고 맛있는 음식인데,

이렇게 나쁜 감정이

실리게 되면 ‘욕’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것들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실려서 나쁜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엿.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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