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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1.0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04 조회수1,846 추천수4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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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제1독서 1요한 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복음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스승님’

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성지를 찾아오신 분들이

종종 불편한 사항들을

제게 말씀해주십니다.
“신부님, 화장실이 너무 좁아요.

 성당이 너무 더워요.

 공기가 탁해요.

성물방이 너무 좁습니다.

길이 미끄럽습니다. 등등....”
고칠 수 있는 부분들은

개선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많지요.

더군다나 제가 있는 성지의

재정 상태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 것에는 “죄송합니다.”

라고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갑곶성지에 처음

 시작할 때에는 불평불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약한 상태였거든요.

너무 추운 겨울이지만 난방이

없어서 벌벌 떨면서 미사를

해야만 했고, 동파되어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땀으로

목욕을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미사 할 장소가 없어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음에도 야외에서 비를

맞으며 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순례객이 많이 와도

화장실이 여자 4칸,

 남자 1칸이 전부였기 때문에

늘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을

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평불만을

듣기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열약했던

당시를 이야기하시면서

“신부님, 그때가 더 좋았어요.”

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불평불만이 더 많아야 하는데

오히려 “좋았다.”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힘들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으시는 것이고,

당시에는 열약한 모습에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용의 마음이 있으니

불평불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주님의 제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도 등장하지만,

제자들은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묵고는 따라 나서지요.

예수님을 불평불만이 가득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따를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신 긍정적인 수용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도 불평을

매우 엄격하게

대하셨다고 합니다.

 불평은 성공하는 삶에

꼭 필요한 2가지 요소인

‘감사와 기쁨’을 가로막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불평을 하시는 분에게

감사의 말과 기쁜 표정을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을 가질 때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얼굴에 표시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면서 당신을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세상과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긍정적인 수용의

마음 자체가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해답은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난 매번 틀렸다.

지금껏 살아오며 나 자신,

 타인, 사회, 문화,

세계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잘못 생각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틀린 점을 조금씩

덜어 매일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게 내 삶이 개선된 이유다.

마크 맨슨)

하느님의 어린양.

"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내 자신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지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존재를 알고 있고

기억해 주는 주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혼자 있을 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아끼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스스로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이제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나’를 아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행복합니까?

만약 ‘나’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도

별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우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조금만

노력하면 분명히 ‘나’를

아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거창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 사람은

그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아주 작은 것들에서도

큰 행복을 얻습니다.

그 행복을 찾고

또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은 먼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귀도 레니의 성 베드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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