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1.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09 조회수1,643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1월 9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 1,9-20

그 무렵

9 실로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섰다.

때 엘리 사제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11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그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14 그를 나무라며,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자 한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16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8 한나는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그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19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20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복음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작년에 요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인 적이 있습니다.

너무 피가 많이 나서 베인

손가락을 움켜쥐고서 병원으로 갔지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소독을 하고

붕대로 칭칭 감아주셨지요.

 지금 그 상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까지 피가 나올까요? 아닙니다.

 언제 베인 적이 있었냐고 할 정도로

상처의 흔적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들어온 세균과

싸워 이기고, 부러진 뼈를

다시 붙이고, 새살이 돋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재생을

위한 놀라운 치유력을 우리의

몸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는 어떨까요?

주님께서는 육체적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 역시 치유할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에서 회복될 수 없다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육체적 치유능력을 받은

우리는 마음의 치유능력

역시 주님으로부터

분명히 받았습니다.

더욱이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또한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방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립니다. 휴대전화를 찾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휴대전화의 액정화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다는 것이었지요.

낮에는 주변이 너무 밝아서

화면의 밝음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주님을 내 삶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중요하다면서 밝게

비추다보니 빛 자체이신

주님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세상의 것들을 어둡게

하고 대신 주님을 밝게 볼 수

있는 침묵과 기도 그리고

묵상 등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주님의 힘은 세상의 악을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는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힘을

우리는 엿볼 수가 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명령만으로도 더러운 영이

복종하고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악을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는 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악을 통해 생긴 어떤 마음의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밝게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언제나

느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이 아니라,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세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에 즉각 반응한다.

그러나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대해선 느끼지 못한다.

(토마스 캠피스)

신동환 바오로 신부의 15주기 미사를

동창신부들과 함께 봉헌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는 세상"

(최천호)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 얻었으니

그만이고 빈손으로 태어나 이만큼

채웠으니 그만 이련만... 부귀공명

꿈을 꾸고 권세 영광을 누리려니

세상만사가 다 헛되이 보이지 않는가...
조금만 마음을 비우면

새털구름만큼이나 포근하고

매미 울음만큼이나 시원할 터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욕심을

비워내면 살아 볼만한 세상인데...
투명한 햇살 가슴에 퍼 담으면

세상이 환해 보이고 잔잔한

작은 미소 얼굴에 피우면

오늘 하루도 즐거워지는 것을...
마지막 죽음 낭떠러지 생각한 들

만사가 다 수포로 돌아가고

그간의 나의 생도 한낱 불티 되어

허공에 날릴 것인데...
비우고 또 비워 여유를 두어

마음의 자유를 누려보자.

삶의 참 자유를 찾아보자.

자연이 나에게 전하는

속삭임들이 들릴 것이다.
나는 이제야 강물이 흐르는

이유를 알 것 같고 걸음 재촉하며

 달음질치는 구름의

흐름도 알 것만 같다.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는

 세상 지난날 내가 보던

그런 세상이 아니다.

훨씬 넓어 보이고 편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마음을 비워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속적인 마음을 비운 11명의 사제와

10명의 부제가 나오는 오늘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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