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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1.1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12 조회수2,318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8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사무 8,4-7.10-22ㄱ

그 무렵

4 모든 이스라엘 원로들이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청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6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10 사무엘은 자기한테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12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13 또한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14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15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16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오.

 17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18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19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다.

 22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복음 마르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많은 이들이 죄인은 성당에

다니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적

의를 일으켰을 때,

 “저렇게 사는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성당을 나와?”

라고 말하는 분을

직접 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쫓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함께 대화를 나눴던

한 청년이 생각납니다.

이 청년은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수감생활도

 몇 차례 했었지요.

그런데 세례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면서 점점 전의 자기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죄 많은 자신이 과연

성당에 다녀도

괜찮은 지를 묻더군요.

솔직히 죄에 대해서 이러한

부끄러움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인상 깊은

 말씀이 떠오릅니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낙원까지 안내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

 왜 낙원까지 안내하는 것인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까지 되어 있다면서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만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라고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 부끄러움을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면서 표현합니다.

이 부끄러움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을 끝까지 따르게 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끄러움만으로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떠했습니까?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이렇게 부끄러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를 뛰어넘는 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나의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계속해서

용서하고 계신다는 것,

따라서 죄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면서 힘차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이웃에게

용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낙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며,

따라서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호세 무히카)

날씨가 추우니 사이판의 해변이 생각나네요.

"결과보다는 과정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수학자로

대성할 수 없다고 어느 유명한

수학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수학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우수한 것이지,

문제를 풀기만 하는 사람은

크게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문제풀이보다 문제제기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함을

삶 안에서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결과만을

 최고로 인정하려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내 자신도 모르게

 결과중심주의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분명히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결과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할지,

그토록 환호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외면할지,

또 당신이 어떻게 생을 마무리

하실지 그 결과를

미리 다 아셨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셨습니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모습처럼 결과만을 최고로

인정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기억하면서,

 지금 한 순간 한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결과가 모든 것이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아집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성당의 성모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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