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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1.1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14 조회수1,653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8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1사무 3,3ㄴ-10.19

그 무렵

3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4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5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7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8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제2독서

1코린 6,13ㄷ-15ㄱ.17-20

형제 여러분,

13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위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4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17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18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복음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스승님’

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언젠가 밤늦은 시간에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분이 저를

흘깃흘깃 쳐다보십니다.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별 일 아니겠지.’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기사 분이 제게 묻습니다.
“혹시 신부님 아니십니까?”
밤늦은 시간이고 또 사복을

입었기 때문에 제가 신부라는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라고 묻자, “신부님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너무 내용이 좋아서 신부님이

나오는 방송을

 다 다운받아서 봤어요.

방금 전에도 스마트폰에

담아서 보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제 택시에 타신 것입니다.

영상으로만 볼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뵈니

정말로 신기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세요.
“신부님, 제가 한 가지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의문인데,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간단한 질문이지만

답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가 막연하고,

여러 질문을 함께 묶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있는가?’

등의 질문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대답해도

답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대답을 해도 모두

 틀릴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질문은 누가 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대답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는 요한의 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쫓아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고 묻지요.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와서 보아라.”였습니다.
우선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생에서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즉,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있을 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온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이를 세세 콜콜히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하신 말씀은

“와서 보아라.”였습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 저 세례 받은 것

 취소시켜 주세요.”라는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여쭤보니

세례 받은 뒤에 잘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당 다니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서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산다고 했는데,

세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도 없고

또 기도도 했는데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하느님과 저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면서 직접 보고서

판단하라는 것처럼,

우리들의 행동을 먼저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길,

그러나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길 끊임없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가

했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실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늘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 뜻에 맞게

 살면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 예언자가

부르심에 응답했던

모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 안에 있다.

사랑은 파괴할 수 없다.

오직 감춰질 수 있을 뿐이다.

(마리안 윌리엄스)

모자상입니다.

"아버지의 유머"

(‘좋은생각’ 중에서)

중국 소설가 린위탕은

해학이 넘치는 글을 썼다.

그의 유머 감각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

시골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설교 시간에 떠드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면 저쪽 남자분이

좀 더 조용히 잘 것 같은데요.”
꼭 부정적인 말로 상대방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바꾸려고만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으로는

바뀌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말,

특히 웃음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 더 크며,

이를 통해 진정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말과

행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인상깊은 성상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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