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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 부대에 담을 때에야 참 기쁨이 /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15 조회수1,275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하면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새 천을 헌 옷에 깁지 않는다. 그리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옷이 땅겨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19-22 참조)’

 

예로부터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 때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했다. 하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단식은 수단이요 은총 얻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단식은 새로운 마음으로 하란다. 바리사이들은 단식 자체를 맹종하고 강요했지만 예수님은 아니라신다. 사랑을 위한 믿음이어야지 고통을 위한 믿음은 안 된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으로 보이려고만 하지 말라시며 오직 하느님께만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 실천하는 게 단식이란다.

 

단식은 육체적 수련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구원의 혼인 잔치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에. 다만 그분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비통해하며 단식하였다. 따라서 참된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며 회개하는 행위일 게다.

 

우리는 늘 새롭게 변화하고 회심하고 싶어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나 자신이 너무 낡고 고집스러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에. 종교적 의미에서 단식은 흔히 육신의 배부름과 욕망에서 생긴 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행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이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순수 종교적 의미보다, 이민족의 지배에서 유다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율법이자 사회적 계약으로 전락하여 단식의 참된 종교적 의미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 주신다. 따라서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곧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는 이들에게 단식 행위는 마치 혼인 잔칫집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기쁨일 게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에게서 당혹감과 불편함을 느껴 시기와 미움이 치솟았다. 사랑은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에 겪는 그 고통에 함께하는 거다. 그것을 안은 게 사랑이다. 이렇게 사랑은 나와 그들을 묶는 거다. 지금 내 삶의 기쁨을 어디에서 찾는지를 돌이켜보자. 이웃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참 기쁨을 느낀다면 그건 성숙한 신앙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새 부대에 담을 궁리를 새로이 해야만 할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혼인 잔치,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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